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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반 - 이재철

 


사명자반

저자
이재철 지음
출판사
홍성사 | 2013-12-04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이재철 목사가 전하는 사도행전 강해서!『사명자반: 복음을 삶으로...
가격비교

 

SPC 신년예배드리던날 목사님께서 선물로 들고오신 사명자반 책과 CD집.

나에게 필요했던 책이다.

아직 준비가 덜 된 날에게 마지막의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아닐까.. 읽으면서 조금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이 또한 아버지의 이끄심이 아닐까..

걸어온 길, 걸어가는 길.. 그리고 걸어갈 길..

그 걸음걸음이 아버지의 발걸음이 되기를..

이땅가운데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또 순복하며.

나의 주인되신 아버지,

주어되시는 주님 앞에서 동사의 삶을 살아가기를 스스로에게 바라며,

예수님의 제자 되고, 삶에서 온전히 증명하며 살아가는 사명자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삶으로 행동으로

믿음가 삶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입증하는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복음을 엮어 가는 사명자행전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중단 없이 계속될 것이다.

 

 

1 믿음의 재정립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는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4:15)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성취하려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믿음의 보편적인 출발점일 수느느 있으나 성경이 지향하는 믿음의 종착역일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앎이 삶으로 연결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믿음은 '구도'다.

믿음은 '탈화'다.

자기 욕망을 좇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서는 새로운 믿음의 삶이 시작될 수 없다. 그 멈춤은 휴식을 위한 멈춤이 아니라, 비움을 위한 멈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 존재를 멈추고 비우라 명령하시는 것은 당신의 것들로 채워 주시기 위함이다.

믿음은 그대를 먼저 찾아오신 주님 앞에서 그대가 '탈화', 신을 벗는 것이다. 자기 멈춤과 자기 비움을 통한 채움 받음을 위한 '탈화'다. 그래서 사명자의 삶도, '구도자'의 삶도, 그대의 신을 벗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믿음은 '여백'이다.

믿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마음껏 역사하시게끔 그대의 일평생을 주님께 계속 '여백'으로 내어 드리는 것이다.

 

믿음은 그대의 수준으로 주님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주님 앞에서 그대가 '여백'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여백'에 당신의 섭리를 펼치실 주님의 수준으로 그대를 끌어올리는 길이다.

 

믿음은 '안경'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믿음은 '메움'이다.

그대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그대의 삶을 주님께 '여백'으로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구멍 냈던 성경을 메워 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원을 보기 위해 '안경'을 쓰는 것도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함이다.

주님 앞에서 다시는 새지 않는 인생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믿음은 '해석'이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과정과 결과는 이렇게 달라진다. 말썽 많던 야곱이 마침내 믿음의 조상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바른 '해석'의 사람이 되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믿음은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의 길을 좇는 것이요, 그것은 바른 '해석'으로써만 가능하다.

 

믿음은 '위치'다.

믿음은 바른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바른 '위치'를 지키면 바른 행동은 절로 수반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대의 바른 '위치'는 하나님의 아래쪽이다. 하나님을 그대 위로 모시는 것읻. 사람과의 관계에서 바른 '위치'는 늘 대등한 위치다. 사람사이에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물질과의 관계에서 그대의 바른 '위치'는 언제나 물질 위족이다. 물질은 그대의 도구일 뿐, 어떤 경우에도 그대의 삶이 주인이 될 수느느 없다.

 

믿음은 '공간'이다.

믿지 않는 사람의 '공간'과 믿는 사람의 '공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인생은 시간이다.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심은, 이 세상이라는 '공간'을 진리의 빛으로 채우라는 말씀이시다. 그대 삶의 '공간'에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넘치게 하라시는 말씀이다. 믿음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2 사명자란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향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린도전서 9:17)

중요한 것은 복음이지 교회가 아니다.

 

사명자란 '행함들'의 사람이다.

교회가 말씀과 동떨어지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지만, 이 세상에는 참된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늘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 각자가 참된 진리를 보여 주는 사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가르치려 하기 전에 먼저 행함의 집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경험은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난다.

 

사명자란 바른 말씀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삶의 목적이지, 어떤 명분으로도 인간의 야망을 위한 미끼가 될 수는 없다.

그대가 사명자로 살아가기 원한다면, 그대는 먼저 반드시 바른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명자란 자기 부인의 사람이다.

자기 부인의 과정을 거친 땅이 옥토가 되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거두는 것은 사필귀정이었다.

그대가 행함의 사명자로 살기 원한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단히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먹어야 결과적으로 참된 사명자로 살 수 있다.

인생은 타인의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사명자는 복임이신 주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의 삶으로 자기 인생을 가득 채워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주님의 역사는 늘 사명자를 통해 일어나고, 사명자에게는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후회가 없다.

 

누군가 거창한 사명의 명분을 내세워도 인간에 대한 봉사와 섬김을 결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복음이 말하는 사명자는 아니다. 복음적 사명은 근본적으로 봉사와 섬김을 위한 사명이다.

사명자는 복음을 좇아 누군가를 위해 완전한 봉사, 완전한 헌신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믿음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계급장을 스스로 떼어 내는 것이다.

 

사명자는 자신의 전공과 직업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사람, 다시 말해 복음이신 주님을 본받아 누군가를 위한 섬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사명자만 사명자를 알아볼 수 있다. 그대가 사명자로 살아가는 한, 어떤 경우에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먼저는 주님께서 그대를 다 보고 계시고, 다음으로는 이땅의 사명자 중 누군가가 이미 그대를 알아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 한 사람이 사명자로 살면, 그대로 인해 많은 사람이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명자로 살아가는 그대가 곧 주님 안에서 성직자요, 그대의 직업이 무엇이든 주님 안에서 사람을 섬기기 위한 그 직업이 곧 성직이기 때문이다.

사명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포도원'이 아니라 포도원의 '주인', 즉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하게 정의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 나라의 정신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동질의 일용할 양식이 올아가게 하는 것이다.

 

사명자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한 후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누군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신이다. 그런 사람의 삶 속에, 그런 사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일구어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자신의 기득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사명자들이 모인 곳에는, 사히 정의가 절로 구현된다.

 

 

3 사명자의 조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

사명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조건이 필요하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경력이나 스펙으로 얻는 것이 아니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 삼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대의 삶의 동기는 더 이상 그대가 아니다.

그대의 삶의 동기는 새로운 생명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그대 삶의 동기가 되시면 그분이 그대를 지배하시고, 결과적으로 그대의 인생은 그분에 의해 사명자의 삶으로 엮어진다.

 

부부는 동일한 가치관을 지녀야 한다.

일평생 사명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혼해서는 부부가 동일한 가치관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부를 별개의 두 지체로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를 '한몸'(창 2:24)으로 보신다. 그러므로 부부가 동일한 가치관을 지닐 때에만 하나님 앞에서 한 몸을 이룬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젊은 나이에 은과 금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소신껏 살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가 베드로와 동일한 가치관을 지니고 베드로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를 각각 다른 두 지체가 아니라, 한 몸으로 보신다고 했다.

베드로의 아내가 베드로와 동일한 가치관을 지니지 않았던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명자 베드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부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삶의 동기이자 목적으로 삼는 동일한 가치관을 지니지 않고는 어느쪽도 참된 사명자의 삶은 불가능하고, 결과적으로 부부간에 일치되지 않은 신앙의 불협화음은 자식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베드로와 그의 아내는,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그대가 결혼했다면 그대의 배우자와 동일한 가치관을 지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하루라도 빨리 사명자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

사명자들로 이루어진 초대교회가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주님의 통로로 쓰임 받는 것은 사필귀정이지 않겠는가?

사명자의 삶은 오직 실천으로 엮어진다. 그대가 진정 사명자로 살기 원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지금 당장 사명자로 살기 시작해야 한다. '내일부터'라며 미루면, 그대가 죽을 때까지 사명자로 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명자에게는 내일이 없다. 사명자에게는 오직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있을 뿐이다.

 

보편적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교회가 보편적 교회를 이루지 못하거나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은, 사명의 겉모양이 어떠하든 본질적으로는 예외 없이 사람을 위한 사명이다.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를 세우고, 누군가를 회복시키고, 누군가와 삶을 나누는, 궁극적으로 누군가를 살리고 사랑하는 사명이다. 그래서 그대가 사명자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편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미래와 희망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명자의 인생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교차하는 가운데 사명의 열매가 결실되게 하시는 것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내려 주신 시간, 물질, 재능 등을 당신의 자녀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는지 셈하시고, 마지막 날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의 셈에 따라 포상하는 분이심을 성경이 밝혀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치고 믿음의 요체가 '의', '절제', '심판'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지만 그 요체를 삶 속에서 구현하는 그리스도인도 흔치 않다. 그 이유는 믿음의 요체는 '의', '절제', '심판'이지만, 믿음의 진행은 그 역순으로 이루어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다시 말해 하나님의 셈하심과 상 주심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4 복음과 사명자행전의 연결고리 I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린도전서 9:16)

제자들에게 복음과 사명자행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는 천상의 세계나 심산계곡의 수도원이 아니라 갈릴리, 평소 그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땅은 원형을 이루고 있기에 누구든지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반드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자신이 현재 서 있는 위치로 되돌아오게 된다. 땅끝은 흔히 오해하듯 아프리카나 북극이 아니다. 누구에게든지 자기 삶의 현장이 땅끝의 출발점인 동시에 목적지다.

 

사명자는 자기 삶의 현장이 욕망의 바다임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가 사명자로 살아야 할 이 땅은, 교회가 교회로 존립해야 할 이 세상은, 심산계곡 속의 수도원이 아니라 황제의 논리가 판을 치는 황제의 바다, 즉 욕망의 바다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눈을 지닌 사람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해서는 결코 황제의 바다, 욕망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명자는 자신이 누군가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누군가를 왜 따라가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물거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을 좇는 삶은 많은 것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언제나 빈손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지금 누군가의 선봉이 되어 있다면, 그대는 지금 그대를 따르는 사람들을 어디로 이끌어 가고 있는지 주님 앞에서 자문해 보아야 한다.

사명자는 언제 어디에서나 진리를 좇으며, 누군가를 진리의 물가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사명자는 현재형으로 임해 계시는 주님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한다.

영성은 언제나 내 삶의 현장에서 나와 함께하고 계시는 주님에 대한 통찰력, 그 주님에 대한 꺠어 있음이다.

믿음은 '용기'

 

주님께서 그대의 삶 속에 현재형으로 임해 계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대가 어디로 가든,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현재형으로 그대와 함께 하실 것이다.

 

사명자는 주님 앞에서 낮고 낮은 어린아이의 마음이어야 한다.

욕망의 바다에서 실패의 쓴잔을 마시는 사람만 말씀의 식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주님께서 욕망의 바다에 뛰어든 당신의 자녀가 반드시 실패의 고난을 겪게 하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대가 욕망의 바다에서 지금 실패했다면, 그대는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믿음이 장성하고 또 성숙해지지 않으면 안 도니다. 그러나 벼가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그리스도인도 장성하고 성숙할수록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더더욱 낮고 겸손해져야 한다. 그것이 자기 삶 속에 현재형으로 임해 계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인간이 스스로 어른이 되려는 것보다 더 미련한 짓은 없다.

주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검은 돌을 잡으라. 그때부터 그대의 삶 속에 현재형으로 임해 계시는 주님과의 깊은 대화가 시작되고, 그분을 힘입어 그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사명자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사명자는 그물이 찢어지면 안 된다.

더이상 기회가 없다는 말보다 인생을 절망하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주님께서 그대를 아무리 높여 주셔도 주님 앞에서 어른 행세를 하려하지 말라. 이 세상 사는 동안 언제나 낮고 겸손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견지하라.

 

 

5 복음과 사명자행전의 연결고리 II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리도전서 9:23)

사명자는 예의의 사람이어야 한다.

제자들 앞에서 주님께서 먼저 의관을 정제하시며 예의를 갖추신 것이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예의의 관계다.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예의를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찮은 우리에게 먼저 예의를 다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반드시 예의의 사람이어야 한다.

먼저 사명자는 하나님에 대해 예의의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예의를 다하지 않고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사명을 깨닫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배의 동기와 목적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까닭이다.

그대가 지금 주어진 사명에 동분서주하느라 예배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위한 자기 사명자일뿐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사명자는 아니다.

사명자는 인간에 대해 예의의 사람이어야 한다.

"백마디의 성경구절을 전하는 것보다 예의범절을 다하는 것이 더 확실한 전도다"

그대는 예의의 주님을 본받아 지금부터 모든 사람에 대해 예의의 사람으로 살기 시작해야 한다.

 

사명자의 사명감은 배신감을 압도해야 한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심이 더 컸기에, 주님게서는 얼마든지 배신감을 느낄 상황이었지만 전혀 배신감에 압도당하시지 않았다.

 

주님을 좇아 신실하게 살면 살수록 작은 일에도 모함받고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주님을 좇느느 사람일수록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기가 쉽다.

그러나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는 물론이요 미래에도 배신감에 압도당하지 않는 사람이 사명자행전을 일구어 갈 수 있다.

 

사명자는 주님의 은혜를 날마다 헤아려야 한다.

주님의 은혜는 헤아려 보는 사람이 보다 크고 많이 누리게 된다.

오늘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꼐서 그대에게 온종일 베풀어주신 은혜를 다섯가지씩만 매일 헤아려 일기장에 기록해 보라. 그대의 인생은 반드시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할 것이다.

 

사명자의 모든 질문은 주님 안에서 해소된다.

"우리의 시선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을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인"

 

사명자는 물질 이전에 마음을 주어야 한다.

그 일을 억지로 하느냐, 아니면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느냐의 차이다.

사람이 마음을 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지 물질이 아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주라. 그대는 마른 떡 한 조각으로도 누군가의 인생을 살릴 것이요, 손을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무너진 인생을 일으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마음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명자의 믿음의 토대는 부활신상이어야 한다.

그분 안에서는 죽음도 끝남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요, 절망이나 체념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요 기회다.

누구보다도 예의 바른 사람이 되라. 그대의 사명감이 그대가 당할 수 있느느 배신감을 압도하게 하라. 매일 밤 주님의 은혜를 헤아려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라. 그대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켜라. 물질 이전에 마음을 주라. 그 위에 더하여 부활신앙의 토대 우에 서라. 그대의 일거수일투족은 매일 주님 안에서 사명자행전으로 엮어질 것이다.

 

 

복음과 사명자행전의 연결고리 III

이와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9:14)

사명자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살아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최선'이지, 모든 사람 가운데 '최고'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지금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자문하고, 정직하게 자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명자는 모든 방향으로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사랑은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다.

상대의 수준으로 내려가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상대를 품는다는 말이다.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경쟁하지 않고 사랑하느느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사명자는 주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살아야 한다.

믿음은 주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항복하는 것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사명자는 소문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역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것

믿음은 피조물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그 영역을 존중하는 것이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믿음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을 지는 사람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드리는 사명자행전을 일구어 갈 수 있다.

 

사명자는 지금 주어진 삶의 자리를 인내로 지킨다.

내가 지금 구하는 것이 나의 영광인가, 하나님의 경광인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나의 뜻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사명자는 자기에게 현재 주어진 삶의 자리가 곧 사명의 자리임을 깨닫고 인내로 지키는 사람이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가 바로 땅끝의 시발점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대가 지금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분명히 하라. 모든 방향을 향해 주님 사랑의 통로가 되라. 주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온전히 항복하라. 진실과 소문을 바르게 분별하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려 하지 말라. 그 위에 더하여 그대에게 지금 주어진 삶의 자리를 인내로 지키라. 그 삶의 자리는 주님께서 그대를 믿으시고 그대에게 맡기신 사명의 자리이다.

 

 

7 사명자 노아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세기 7:5)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자녀를 세우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늘 실패자를 부르신다.

노아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혜가 먼저 노아에게 임했다.

노아가 잘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고 자신의 삶으로 응답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멀리 있지 않다. 그대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그대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현재형으로 그대에게 임해 계신다. 그 은혜를 은혜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 삶으로 응답할 때, 그대는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자가 될 것이다.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을 믿지 않거나 비웃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그대가 코끝에 호흡이 있는 동안 이 세상에서 사명자로 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대 자신을 위해서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서, 그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히 10:36)

인내의 과정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 것 자체를 우리 자신의 공로로 착각하는 자기 교만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이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다. 인내는 사명의 열매가 결실되는 텃밭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무너져 내리고, 낮아 보였던 사람은 높아지는 것이다.

그대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그대 주머니에 든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위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신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그대와 함께하고 계신다. 그대에게 남은 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그대 삶의 자리에서부터 사명자행전을 일구어 가는 것이다.

 

 

8 사명자 모세

그 후에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명기 34:10)

교회는 주님을 주어로 모시고, 자신은 그 주어와 전적인 종속관계의 동사가 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모세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어로 모시고, 자신은 그 하나님의 동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가치는 소유가 아니라 의미에 있고, 참된 의미는 삶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모실 때에만 주어진다.

 

 

9 사명자 예수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하나님의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은 자기 버림으로 부터 시작된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사명자가 되기 마련이다.

사명은 책임감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명자는 사람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그 구별된 생각으로부터 오병이어의 이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입은 사람이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구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는 구별된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일에는 무슨 일이든 항상 질서와 정리 정돈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10 그날이 오면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떄에 인자가 오리라(마태복음 24:44)

만약 오늘이 그날이라면, 그대의 코끝에서 숨이 멎는 마지막 날이라면, 그대는 그대의 인생을 어떻게 스스로 평가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는 멸하시고, 진리 안에서 선하고 바른 삶을 산 사람은 반드시 높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보다 더 중요한 자리는, 우리가 머물렀던 자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포기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내려놓은 것은 무엇입니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희생한 적이 있습니까?

 

생각 없이 살면 출생보다 더 중요한 죽음은 허망한 공동묘지를 향한 이정표가 될 뿐이다. 오직 지혜로운 사람의 죽음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가나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이정표로 남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위한 명령임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의 주어이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현재형으로 역사하신다는 의미다.

 

믿음은 구체적으로 지키는 것이다.

삶의 우선순위다. 삶의 전반에 걸쳐 주님께 우선순위를 드리는 것 - 그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이요, 그 사람이 달려가야 할 사명의 길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그날 그 순간을 맞았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대가 사명자로 살기만 하면 단 하루를 살아도 주님께서는 그 하루를 천년 같게 하신다.

 

그대가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그대는 머지않아 사는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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