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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일과 영성


팀 켈러의 책들은 가볍지 않지만 읽어봐야 하는 책. 군더더기 없으나 곱씹어야 하는 책 인 것 같다.

특히 일과 영성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 꼭 필요한 책 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 주어진 일, 이 사업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 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회사 행사를 치르고 또 자선경매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 있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밑줄긋기

뛰어난 지성

평범한 아저씨 같은 말투


날마다 언제 무슨 일을 하든 기업의 리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 씨름하고 고민했다.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해야 한다는 점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일을 시키시고 한 기업의 리더로 만드신 데는 특별한 목적, 곧 다른 이들과 힘을 모아 세상을 바람직하게 바꾸어 가게 하시려는 뜻이 있다고 믿었다.

세상에 나가 뭇 백성들을 섬기도록 식구들을 훈련하고 무장시키기보다는 교회 내부에서 봉사하도록 준비시키는 데 집중하는 목회자들이 허다했다.


성공이든 실패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의 일부다. 힘과 끈기를 얻을 수 있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복음은 지금 만들고 있는 제품, 일하는 회사, 섬기는 고객들을 하나님이 낱낱이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난 끊임없이 실수를 범하고 죄를 짓지만 하나님은 선하심과 은혜로 내 삶 가운데서 늘 승리하실 것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모든 인간과 일을 존엄하게 대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누구나 즐겁게 지내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의무가 있다.

말하고, 일하고, 이끄는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 완벽한 모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나침판이 되라는 뜻이다.


실패는 어덯게 받아들이고 처리해야 할까?


일은 단순히 '밥벌이'가 아니라 소명이다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 소명이라든지 부르심 같은 개념을(이것은 확실히 존재한다) 다시 가져와야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일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돌아서야 한다. 노동은 그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개인적인 이해를 초월해서 어떤 존재를 섬기는 사명으로 일의 본질을 재설정하지 않으면 부르심이란 의식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일을 소명으로 보는 시각의 근원은 성경에 있다.

연결, 신앙과 일의 통합


신앙과 일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노동은 기독교 '세계관'을 좇아야 한다는 뜻이다.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무슨 일을 하든지 '진짜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무엇을 추구하든 '진짜'는 따로 있다.



part1. 일,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

chapter 1.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

행복하고 싶다면, 주님처럼 일하고 주님처럼 쉬라


성경은 입을 떼자마자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노동이 얼마나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지만 우리 또한 그분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은 실제로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세우는 사람들'을 통해 집을 지으신다.(공급)


하나님의 선한 섭리는 늘 일하는,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과 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

인간은 일을 하도록 설계된 터라 일거리를 잃으면 적잖이 불안해진다.

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짚어 두고 싶다.

노동은 자아 발견의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일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설령 교회 사역일지라도 하나님과 대적하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셈이다. 삶의 으뜸가는 토대는 주님과의 관계다.

일을 정기적으로 멈춘 뒤 예배하고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즐기는 시간을 갖지 않는 한, 삶의 의미를 진정으로 체득할 수 없다.

여가는 찬양하는 심령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데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일은 의미 있는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핵심 요소다.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삶에 목적을 주는 주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다.

일 자체는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일하도록 지음받았고 일을 통해 자유로워진다.


chapter 2. 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성경의 시각. 손으로 하든, 머리로 하든 일이란 일은 죄다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증표로 인식한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로지 사람만이 일, 곧 직무를 맡았다는 점이다.


일은 하나님이 친히 행하셨고 인간이 주님을 대신해서 하는 행위이기에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일 자체가 존엄할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일이 고귀하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정원사였으며 신약에서는 목수였다. 주님이 일에 부여하신 엄청난 존엄을 담아내지 못할 만큼 하찮은 일은 없다.

일을 대하는 태도

진심으로 염려할 뿐만 아니라

업무에 자부심을 느낀다.


성경이 말하는 '샬롬'은 영적인 평안과 신체적인 안녕을 모두 아우른다.

하나님은 다양하고 창의적인 일을 무척 즐기시는 듯하다.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지음받았으며 지위나 급여와 상관없이 일은 인류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개척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신과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chapter 3. 일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수단이다

일터에서 주님의 매뉴얼을 따라 야심차게 일하라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문화 명령

1. 하나님은 "땅에 충만하라", 즉 수를 늘이라고 명령하신다.

2.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며' 더 나아가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건 청지기나 대리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창조와 관련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면, 주님의 사역 패턴을 따라 일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은 허접하게 만들지 않으셨어! 나도 그럴거야!" 성경이 가르치는 일의 개념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면 주어진 자원에서 가치를 창출하려는 소망이 솟게 마련이다.


창세기 2장 19-20절에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 짓는 작업은 창조 과정에 동참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이다.

주님은 창조 사역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일에 인간을 동참시키셨다. 인간 본성과 기질의 폭을 최대한 확장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문명을 건설하게 하시려는 배려였다.


크든 작든, 규모와 상관없이 온갖 일이 다 중요하다.


chapter 4. 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이다

자신만을 위하지 말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라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과업으로 일을 새로이 정의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일상적인 일은 소명이 될 수 없다.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에서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에 대해 이처럼 혁신적인 통찰을 가져야 한다.

도리어 일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보아야 하며 그 목적에 따라 직장을 선택하고 업무에 임할 필요가 있다.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

라말을 탁월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주님이 인류에게 선물을 나눠 주시는 수단이다.

제힘으로 이룬 선한 공로와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성경의 원리를 제대로 깨달은 크리스천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하는 일의 진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혁명적인 노동관은 모든 일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고상한 의미, 다시 말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목적을 부여한다.


일은 저마다 남들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게 하며... 다른 이들 또한 이편에 유용해지게 만드는 틀이다. 우리는 심고(일을 통해) 하나님은 그걸 키워서 인류를 하나가 되게 하신다.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만큼 이웃을 사랑하기에 좋은 방법은 없다. 다만 노련하고 능숙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하나님이 일을 주신 목적이 인간 공동체를 섬기게 하는 데 있다면, 그 뜻을 받드는 으뜸가는 길은 주어진 과업을 끝낼 뿐만 아니라 제대로 해내는 것이다.

교회가 해 주어야 할 얘기는 따로 있다. 신앙을 좇아 살려면 무엇보다 훌륭한 테이블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일이 곧 기도


일을 하면서 다양한 경로로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현재 진행중인 창조 과정에 동참하는 게 크리스천의 사명이라고 할 때, 그 사역을 떠받치는 기반은 '능숙함'이 되어야 한다. 각자 가진 달란트를 최대한 노련하고 능숙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능숙함은 가장 기초가 되는 자질이다.


'능숙한 솜씨는 곧 사랑의 표현'이라는 원리를 적용한 사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의 이런 속성을 파악한 이들도 여전히 성공하고 싶어 하지만 일중독에 빠지거나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게 사실임을 믿는다면 다수에게 헤택이 돌아가는 일과 더 많은 보수를 얻을 수 있는 일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 경우, 의당 보수는 줄어들지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쪽을 골라야 한다.

남을 돕는 일이 아니더라도 모든 노동은 본질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다.


"완벽하게 해내기만 한다면, 감자껍질 벗기는 일로도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단다!"

하루하루 하는 일은 무엇이 됐든지 간에 결국 친히 부르시고 준비시켜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다.



part 2. 일, 끝없이 추락하다

chapter 5. 아무리 일해도 열매가 없다

밤낮없이 매달려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버겁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너희는 내 명령을 지켜야 한다. 너희가 날 믿고 사랑한다면 순종해야 한다.

인류는 제힘으로 권위의 근원이 되기로 작정하자마자 참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사랑하는 걸 으뜸으로 삼고 살도록 지음받았으며 거기에 충실해야만 비로소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다.

세상은 지금 온통 '허무에 굴복'한 상태다.


수치심. 존재의 중심에서 자신을 향해 갖는 불편한 감정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인정은 고사하고 제대로 분별하지도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불신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관계는 대립과 분노를 자극할 따름이다.

정확하게 자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한다손 쳐도 일터에서 주기적으로 좌절을 경험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행복해지려면 일이 필요하다. 피조물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크치스천들은 친히 지으신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소망과 깊은 위안을 찾고, 온몸을 던져 일하며 열매를 구할 때마다 가시덤불이 자라나는 이 땅의 현실에 무릎 꿇지 않을 힘을 얻는다. 아울러 이생에서 하는 일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노동의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또한 온전할 수도 없음을 받아들인다.


chapter 6.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

그저 성공의 쳇바취를 따라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


이곳 세상에 속한 그 무엇도 의미 있는 삶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해 아래 있는' 존재와 업적은, 심지어 문명 그 자체까지도 끝내 잊히게 마련이며 그 영향력 또한 완전히 사라지는 법이다.(전 1:3-11_

한마디로 말해, 일을 해서 큰 성공을 거두어도 '해 아래서' 사는 삶이란 전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타당한 포부는 부적절한 구원으로 변질되었다.


괴로움과 고통이 너무 심해서 쉼을 누릴 수가 없었다. 일이 돌아가는 형편에 따라 심령이 큰 폭으로 요동치는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성실하게 일하신 뒤에 진정한 안식을 즐기셨던 하나님(창 2:2), 그리고 풍랑 속에서 곤히 주무셨던 구주의 모습(막 4:38)과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대비시킨다.

일에서 그처럼 자주 소외를 경험하는 또 다른 이유는 불의와 비인격화라는 요소가 모든 사회 체제 안에 늘 도사리고 앉아 일의 본질을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탓이다.


잘할 수 있는 일에 뛰어들라고 가르친다. 달란트와 능력에 맞아야 한다.

노동의 주목적이 세상을 섬기는 데 있으므로 이웃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쪽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그저 가족과 인간 공동체, 그리고자신만 생각할 게 아니라 활동하고 있는 분야의 유익도 도모해야 한다.

지금 하는 일을 가능한 한 더 낫고, 더 깊고, 더 깔끔하고, 더 노련하며, 더 고상하게 처리하는 방식을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을 갈고 닦는 데 힘을 쏟겠다는 건 꽤 훌륭한 목표다.


일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몫'이며 거기서 얻는 만족이야말로 흡족한 삶의 필수 요건이다.

전도서 3장 13절에 있다.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선물을 지켜 나갈 것인가?

문자 그대로 '한 줌의 평안'을 선택하라고 권면한다.

일과 평온은 둘 다 필요하다.


돈을 덜 버는 한이 있더라도(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평온의 궁극적인 근원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짐을 대신 지셨으므로 참다운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뿐이다.(마 11:28-30)  예수님의 복음을 떠나서는 이웃을 섬기거나 일을 잘 해내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출세하고 이름을 낼 심산으로 수고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chapter 7. 탐욕의 수단으로 변질되다
고생해서 이만큼 일구었는데 이걸 포기할 수는 없어!

인간 마음에는 일과 거기에 따르는 이익들을 삶의 으미와 정체성을 세우는 바탕으로 삼으려는 강력한 성향이 있다. 그러한 점도 일에 열매가 없어지고 뜻이 퇴색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웃과 자신을 구별해서 온 땅에 부각시키고 스스로 특별한 존재임을 과시하는 방편이 될 따름이다.


교만은 본래 경쟁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본질적으로 경쟁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 교만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만 가지고는 기뻐하지 않으며, 옆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야 비로소 행복해 한다.


도덕적으로, 문화적으로, 영적으로 애매모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더불어,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가? 에스더서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받은 게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면 늘 더 많은 걸 갈구하는 탓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가진 걸 활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같이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선하고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중재자시다.

에스더를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화살표로 본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표본이 되는 스승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개인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신 구세주로 인식한다면 저마다 자신이 주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주인공이 되려고 발버둥 칠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던 분을 섬길 때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


chapter 8.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되다
인생이 통째로 일에 빨려 들어가 망가지다


인생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거나 아니면 다른 무엇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거나 둘중 하나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진리


루터는 여기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합리화하거나 의로움을 입증하려 한다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상은 침투력뿐 아니라 파괴력 또한 막강하다.

거짓말하는 죄의 밑바닥에는 우상숭배라는 더 교묘하고 근원적인 악이 깔려 있는 법이다. 올바르지 않은 일(몰인정한행동, 부정직한 말, 깨트려 버린 약속, 자기중심적인 태도)들은 어김없이 마음 속 깊은 데 자리 잡은 확신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결정적으로 삶의 행복과 의미를 좌우하는 요소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상숭배는 마음을 지배하는 힘이 있으므로 행동 또한 통제한다.


반면에 권력과 인정의 우상은 업무에 지나치게 매달리거나 무자비하고 균형을 잃은 방식으로 작업하도록 이끌어 간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집합적으로도 우상은 죄와 문제가 싹트는 온상이 된다.


집합적 우상이란 '훌륭한' 문화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절대화하는 걸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문화들이 제각기 초점을 맞추는 강조점들은 일에 유익을 끼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왜곡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유익한 측면을 확장하고 과도하거나 왜곡된 면을 보완하자면 직업, 또는 산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영향을 미치는 우상의 형태를 분간해 내야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관심사와 욕구보다 더 큰 동기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은 이제 자신을 규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기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게 되어 있다. 과학의 앞길을 안내하고 한계를 지어 줄 더 고상한 이상이나 윤리적 가치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천들 역시 광고하고 선전하면서 잠재 고객들에게 상품이 삶에 가치를 더해 주리라는 점을 잘 부각시켜야 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품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알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과연 일에 소망이 있는 걸까?" 라든지 "어떻게 해야 뒤틀린 노동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을 피할 길이 없다. 어떻게 지난날의 문제점들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목적과 섭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 그건 지극히 현실적인 목표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못 박아두는 데서부터 이 질문들에 답하기 시작하는게 좋겠다.

복음은 지금 이곳에서 영감을 잃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충족감을 느끼며, 신실하게 일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1. 복음은 일과 관련해서 맥락이 전혀 다른 대안을 내놓는다.

2.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파트너가 되어 세상을 돌본다는 새롭고 풍성한 노동관을 제공한다.

3. 복음은 인간의 마음과 관련한 지혜로운 조언뿐만 아니라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온갖 건강한 지침들을 통해 대단히 새롭고도 민감한 윤리 기준을 선사한다.

4. 복음은 일을 하는 동기를 백팔십도 바꿔 놓을 뿐 아니라 상황이 좋든 나쁘든 늘 함께하는 신선하고 강인한 힘으로 심령을 가득 채워 준다.


part 3. 일과 영성, 복음의 날개를 달다
chapter 9. 복음의 관점으로 일을 이해하다

회사 신우회에 참석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말라

스토리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매일 일하는 현장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내러티브를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주요한 지점 가운데 하나다.
온 세상은 구원을 받고 회복될 것이다. 예수님은 영혼과 육신, 이성과 감정, 인간과 자연을 모두 구속하신다. 구제 불능이란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자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비즈니스의 우상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돈과 권력은 단연 리스트의 꼭대기를 차지한다. 하지만 우상일지라도 영원한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회사가 거둔 이윤과 성과는 지혜롭게 관리되기만 한다면 근사한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라는 말씀을 잘 아는 크리스천 노동자나 경영인들은 서슴없이 하나님을 높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일을 통해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오직 신뢰할 만하고 한결같은 독립성의 보증인만이 이윤을 올릴 수있다.

목적이 없는 이윤은 재앙을 짓는 레시피

목적을 명쾌하게 밝히는 선언을 토대로 일단의 가치기준들을 엄밀하게 토의하고 확인하며 제도화하는 기구가 늘 필요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복음적인 세계관을 좇는 비즈니스에서 이윤은 수많은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복음의 스토리라인

직원들이 회사의 사명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모습은 기업인들에게 큰 격려가 될 것이다.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건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눈치를 보며 동료들과 빈둥거리지 않는 선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적인 세계관에 담긴 의미, 그리고 일하는 삶 전반과 손길이 미치는 조직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곰곰이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


관점없이 본다는 말은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결국은 악을 이길 선이 존재한다.

예수님이 마음에 살아 역사하셔야 꾸준히 기쁨이 샘솟아서 의술을 자존감의 토대로 삼거나 수고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을 만날 때 마음이 싸늘해지지 않을 수 있다.

친히 몸을 속량하신(롬 8:23) 하나님은 최고의 의사다.


그러므로 복음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일한다는 게 곧 일하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눈에 쓰고 세상을 '내다볼' 안경쯤으로 여기는 게 더 진실에 가깝다.

크리스천 경영인들은 이윤을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만 인식하며 무엇이 됐든 공동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사업을 열정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다.


크리스천의 세계관을 렌즈 삼아 일을 바라보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가?

-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문화와 일하는 분야에서는 어떤 스토리라인이 주류를 이루는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악당인가?

- 무엇이 의미, 윤리, 기원, 숙명 같은 개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가?

- 무엇이 우상 노릇을 하고 있는가? 무얼 소망하고 또 무얼 두려워하는가?

- 현재 종사하는 직업 세계에서는 그 스토리라인을 어떻게 다시 해석해 들려주는가? 이야기 속에 직업 자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어떤 부분이 본질적으로 복음과 일치해서 기꺼이 동의하며 거기에 맞출 마음이 드는가?

- 지배적인 세계관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가? 어떤 점인가? 

- 개인적으로 이 스토리들은 일의 형식과 내영, 양면에 걸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어떻게 하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답게 구별된 모습으로 일할 수 있는가?

- 지금 하고 이쓴 일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고, 넓게는 사회에 봉사하며, 직업 세계 자체에 도움을 주고, 능숙함과 탁월의 모범이 되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기획가 있는가?


크리스천이 일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할 때, 세계관이란 영역은 실행에 옮기는 씨름이 가장 치열하고 또한 힘겨운 세계다.


chapter 10. 일에 대한 이원론을 배격하다

이건 세상 일이고 저건 하나님 일이라는 이분법을 배격하라


일은 섭리를 이뤄 가시는 창조주의 주요한 도구다.

크리스천의 노동은 거룩한 창조 사역의 연장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세상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야 한다. 크리스천의 노동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연장으로 이웃을 바라보며 어떻게 그이들을 위해 탁월하게 일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의 문화와 직업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chapter 11. 일을 하는 동기가 바뀌다

높은 보수나 칭찬을 위해 일하지 말라


개인의 직업윤리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공공의 이익에 미치는 누적 효과가 있다.

세계적으로 경제발전과 정치 안정의 발목을 잡는 가장 무서운 덫 가운데 하나로 부패를 꼽았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빈부차가 극심한 지역에서는 뇌물이 일상이다시피 만연하지만 경제 기반이 탄탄하고 시민사회가 안정된 국가에서는 쉬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노라고 고백한다.

정직성은 당사자의 차원을 넘어 더 넓은 사회에 영향을 주며,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청렴한 행동을 뒷받침해야 한다.


골로새서 3장 23절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 신앙은 다른 세계관에서 볼 수 없는 중요한 자원들을 제공하므로 일터에서 그대로 살아 내기만 하면 특별히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기독교 신앙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상대를 용서하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그 개념의 정의를 끌어올렸다.


크리스천에게 사랑은 으뜸가는 삶의 의미다. 심지어 서로 잘 알고 사랑하는 세 위격이 한 분 하나님을 이룬다는 삼위일체 교리조차도 사랑을 기반으로 한 관계가 모든 실재의 구성 요소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들로부터 사랑과 경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가운데서 이미 누리셨던 사랑과 기쁨, 존경과 영광을 나누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온전한 인간'의 요건을 졸이고 또 졸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질만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적어도 크리스천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해 인권을 이해하는 자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결정은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 갈 수 있다.


지혜를 쌓는 몇 가지 길

1.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알아 가야 한다.

2.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잘못된 결정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의 실체와 뜻을 이룰 능력이 없음을 절감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3. 경험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교만한 이들은 실패할 때마다 남을 탓하는 반면,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채깅ㅁ까지 끌어안고 자책을 거듭한다.


어떻게 성령님이 우리를 지헤롭게 하시는지 살펴보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 16:13-14)

예수 그리스도를 더 생생하고 선명하게 부각시켜서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내적 질서와 자비, 겸손, 담대함, 만족, 용기를 심어 주신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요소들이 지혜를 키워서 직업적으로든 인격적으로든 갈수록 더 나은 결정을 내리게 이끌어 간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께 하듯이 해야" 한다.


직원들은 온 마음을 다해(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전인적으로 일에 몰입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그리스도께 하듯이" 일한다.


거룩한 자비와 용서를 더 경험할수록 주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이 더 커진다고 가르친다. 진정한 두려움이란 경외감과 경이로움, 그리고 주님을 욕되게 하거나 슬프게 할까 깊이 염려하는 짙은 사랑과 존경 가운데 살아가는 거 말한다.

마음과 능력을 온전히 쏟아서 최대한 능숙하게 처리하며 부담이 아니라 특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크리스천은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크리스천이 하는 일은 어느 모로든 정직하지 못하거나 불성실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종이 주인을 대하듯 깊이 존중하는 마음을 품고 부리는 이들의 필요를 채우라는 뜻이 담겨있다.

크리스천은 오직 한분, 사랑이 많으신 하늘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일해야 하며 그런 마음가짐은 책임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크리스천은 인정사정없다는 소릴 들어서는 안 된다. 반듯하고 따뜻하며 이웃에게 헌신적이란 평판을 얻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기꺼이 용서하며 화해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절절하게 느껴져야 한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가 떠맡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나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힘닿는 데까지 남드의 짐을 지고 싶어 하는 겁니다."


아울러, 크리스천은 너그럽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경영자들은 직원이나 고객들에게 시간을 쏟고 자금을 투자해서 너그러움을 드러낼 수 있다.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수익률을 줄여서 고객과 이익을 나누고 직원들에게 더 많은 급여를 줄 수 있다.

크리스천은 또한 난관과 실패 앞에서도 평온하고 침착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는 인격적인 품성을 개발하는데 복음의 자원을 끌어다 쓰고 있는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크리스천은 편협한 종파주의자처럼 비쳐지면 안 된다.

크리스천은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똑같이 존중하고 대우해야 한다. 동시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있게 인정해야 한다.


저마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어떻게하면 (신앙 공동체와 일터에서) 더 많은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을지 늘 탐색해야 한다.

다가오는 기회를 포착해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늘 준비하고 있으라. 하나님이 언젠가는 문을 열어 주시리라는 소망을 품고 일하라.


chapter 12. 새로운 능력으로 일하다

구원의 확신을 가슴에 새기고 열정을 품고 일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하나님이 새로운 기회를 주시려고 직접 찾아오셔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일에 휘둘리고 있는 건 아닐까?

성경이 말하는 열정의 참뜻은 자신의 자유를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가리킨다.(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해보라)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리듬을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열정은 스스로가 아니라 인류와 하늘 아버지를 위한 것이다.


창조주께서 세상을 지으신 뒤에 쉬셨으므로, 인간들 역시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끝낸 뒤에는 반드시 쉬어야 한다.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인간들의 창조 행위의 아름다운 속성을 즐기고 높이는 길이다.

안식은 그런 점에서 창조주가 설계를 찬양하는 행위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거룩한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면, 누구든 노예 신세다.


아울러, 안식일을 '믿음의 행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안식일을 지키는 건 세상을 움직이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더 나아가 지금 담당한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실감하게 하는 질서 정연하고 신뢰도가 높은 방법이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걸 알아야 한다. 혼자 일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쉬는 사이에도 염려를 내려놓지 못한다면 안식일에 참여하고 있는게 아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나누는 교제를 통해서도 크리스천들을 든든히 서게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서 '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아셨다.

녹초가 되도록 일을 시키지 않으며 최상의 성과를 내지 않아도 구박하지 않는 상사는 그리스도뿐이다. 주님이 시키시는 일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까닭이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의 참뜻은 예수님을 찬양하며, 따라가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쉼을 누리는 이들을 가리킨다.

심령이 숙면을 이루지 못하면 무얼 해도 만족이 없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어떤 인상을 주고 있는지 고민하기를 집어치우지 않는 한, 남들한테 결코 좋은 인상을 줄 수 없다.

자신을 버리라. 참다운 자아를 찾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관점으로 보자면, 스스로 어떻게 창조된 존재인지를 돌아보는 성찰이야말로 부르심을 찾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은사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며 창조주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신앙과 일을 더 잘 통합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면면을 살피는 게 중요했다.

죄를 더 철저하게 인식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더 깊이 경험한다는 사실

구원받았음에 감사하는 삶이 자기 의에 기대어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인생보다 훨씬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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