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퍼왔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사진주인님 #너무예뻐서지나칠수없었어요 #센스갑 #좋은배우자만날거에요]
The Meaning of Marriage
믿고보는 팀켈러의 책. 결혼을 말하다"라는 제목에 홀딱~ 그래서 고민 없이 구매했지만_ 생각 만큼 진도를 빼지 못했던 이유는
바빴던 일생에서 좀처럼 책 읽을 틈을 만들지 못했던 이유도 있겠으나
결국 돌아보면 나의 게으름 때문이었으리라.
어쨌거나_
내 삶의, 내면의 변화에 딱 맞는 속도로 책을 한 장씩 넘겨 갔고
더딤이 오히려 나의 속도에 걸맞는 시간이었음을 뒤 늦게 깨달으며
감사_
프롤로그
결혼, 그 영광스러운 비전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다.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공통적인 특성
어떤 '느낌'
태어날 때부터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어떤 갈망 같은 것을 알아차려 주는 누군가를 마침내 만나는 순간, 평생가는 우정이 형성된다.
성경에는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인류만의 고유한 세 가지 제도가 등장한다. 가족과 교회, 그리고 국가다.
성경은 창세기의 결혼(아담과 하와)으로 시작해서 계시록의 결혼(그리스도와 교회)으로 끝난다. 결혼은 하나님의 아이디어인 동시에 그 밑바닥에 깔린 특정한 인류 문화의 성격을 반영하는 인간의 제도이기도 하다.
복음은 결혼의 본질을 깨닫도록 이끌어 주며 결혼은 복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부부가 서로 섬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러려면 반드시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결혼은 영적으로 친구가 된 두 사람이 서로 도와가며 하나님이 설계하신 존재로 변해 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part1 결혼은 현실이다
결혼하면 불행해질 것 같다
01 결혼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바로잡으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엡 5:31-32)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한 인간관계는 없다.
배우자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고 경이로운 일인 까닭이다.
한없이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근사한 일, 이것이 성경의 결혼관이다.
결혼이란 본질적으로 관계를 으뜸으로 여기게 되어 있지 않은가?
지난날 결혼은 공익에 이바지하는 공적인 제도로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개인의 만족을 위한 사사로운 계약이 되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중요해진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바꾸려 들지 않는 짝"
이리저리 달라지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여성들에게 원망을 쏟아내는 남성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현대인들은 결혼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비극을 피할, 최소한 비극을 맞게 될 위험을 막을 대안은 지옥살이 뿐이다.
'딱 맞는 짝' 같은 것은 애당초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결혼 상대를 속속들이 알 수 없다. 다만 그렇다고 생각할 뿐이다. 처음엔 확실하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그 마음이 변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중요한 건 더불어 살게 된 낯선 상대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결혼은 한 인간을 또 다른 존재와 밀접하게 묶어 주는 것이다.
지나치게 로맨틱하거나 이상적인 결혼관을 가졌다면, 인생에 미치는 죄의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보어야 할 것이다. 반면 너무 비관적이고 냉소적이라면 결혼의 거룩한 기원을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결혼 제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과 결혼은 서로 해석하는 통로가 된다.
그릇된 선택은 없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성취와 희생 사이에서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희생을 통해 상호 성취하는 길을 따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모든 걸 포기하셨다.
결혼 생황이 정상적으로 원만하게 유지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복음의 실상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부부 관계에 힘을 불어 넣고 기준을 제시하는지 알아야 한다.
결혼이 복음의 신비를 드러낸다.
우리는 결혼을 통해서만 진정한 내면의 변화를 이룰 수 있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감상이다.
사랑이 빠진 진리는 가혹하다. 정확한 정보를 주긴 하지만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방법은 빠져 있다.
배우자가 복음의 능력에 힘입어 이편과 똑같은 진실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맛보게 되면, 머지않아 삶을 바꾸는 사랑을 상대방에게도 나누어 주게 될 것이다.
이런 남편, 아내와 정말 살고 싶지 않다
02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 중심성과 맞서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교만하고 방탕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히 남들을 섬긴다는 것이다.
사도는 앞으로 무엇을 말하든 남편과 아내가 모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상태임을 전제로 한다고 못 박는다. 성령님의 권능으로 남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만 결혼 생활이라는 난제에 맞설 힘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란 말을 들으면 내면의 평안과 능력을 먼저 떠올리지만 그것은 성령 충만의 결과일 뿐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가리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하실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다(요 14:17, 26).
'알리다'는 주의 환기시키는 중대 발표라는 뜻의 헬라어.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에 담긴 의미를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생각에 사무치도록 펼쳐보여 주는 것이 성령님의 일인 셈이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은 떄로는 고요히, 더러는 격렬하게 기쁨에 겨운 인생을 살아 낸다는 뜻이다.
서로 순종하라.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마음을 다해 배우자를 섬길 수 있고 서로 책임을 지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확보할 수 있다.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셔서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25절)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각각의 배우자에게 서로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희생하라고 가르친다. 남편이든 아내든 스스로가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편의 이해보다 상대편의 득실을 먼저 생각하고 중요하게 여기라는 명령이다.
자신보다 상대방의 필요를 앞세운다는 데 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부부는 반드시 배우자를 섬겨야 하며 기꺼이 스스로의 유익을 포기해야 한다.
바울은 자발적으로 '종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복음자체와 연결시킨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는 능력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킬 때만 가능한 일이다.
문제의 근원, 자기 중심적인 마음가짐
결혼 생활을 하면서 종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섬기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죄에서 비롯된 지독한 자기중심성이다.
자기중심성은 바울이 열거한 바와 같이 조급하고, 쉽게 화내고, 너그럽거나 따뜻함이 배어 있지 않은 말을 함부로 쏟아내고, 형편이 더 나은 이들을 샘내고 헐뜯으며, 누군가에게서 받은 지난날의 상처와 아픔을 버리지 않고 곱씹는 따위의 증상들이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결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삶의 중심에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상대방의 필요를 앞세우는 섬김의 능력이 필수적이다.
인간이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에배하며 그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도록 지음 받았다.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이기 때문이다. 결혼에서는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 으뜸이며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성품과 사역으로 보여 주신 거룩한 실재가 드러난다. 주님이 손수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기꺼이 주어야 참으로 소유할 수 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가짐에 맞서라.
성경은 하나님과 이웃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해 사는 것을 죄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누구나 따뜻하고 정중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
휴전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지내는 결혼 생활을 피할 방도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이기심에 있음을 인정하고 배우자보다 자신의 상태를 더 심각하게 여기며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길뿐이다.
어느 한쪽이 먼저 나서는 것만으로도 앞날은 훨씬 밝아질 수 있다.
남편은 집안의 머리가 되고 아내는 가장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부부생활에 적용해야 할 기독교적인 원리는 성령님의 역사에 기대어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부족한 존재로 여긴다는 의미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흔히 커다란 기쁨과 연결된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주님을 경외(또는 두려워)' 한다는 말의 참뜻은 ..... 관계와 연관이 있다.
창조주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놀라다 못해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과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같은 뜻이다.
바울은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소가 바로 성령님이 만드신 이타적인 마음이라고 말한다.
필요를 채워주고 내면의 불안과 회의를 다독여 주는 누군가에 끌릴 때, 흔히들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식의 관계를 맺게 되면 섬기고 주기보다 요구하고 통제하려 들기 싶상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part2 결혼은 성장이다
사랑하는데 꼭 혼인신고가 필요하다
03 서로를 책임지겠다는 공개적인 약속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 창 2:24)
성경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떄 얼마나 많이 받고자 하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많이 줄 수 있는가를 먼저 따진다. 이 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걸 기꺼이 잃을 수 있을까?
결혼은 가장 심오한 언약이다.
성경이 말하는 결혼 개념의 중심에는 언약이 자리 잡고 있다.
언약 관계는 저마다의 일차적인 필요보다 관계를 앞세운다.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언약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약속이므로 배우자뿐만 아니라 주님과 맺은 계약이기도 하다.
결혼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가장 심오한 언약이다.
언약은 이처럼 사랑과 법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관계를 가리킨다.
의무나 책임이라는 의식을 갖는 순간 기쁨은 숨이 끊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의 시각은 완전히 딴판이다. 성경은 사랑이 온전히 사랑다우려면 구속력이 있는 의무로 틀을 잡아 주어야 한다고 본다.
결혼 서약은 현재 사랑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사랑을 염두에 두고 함께 나누는 상호 간의 구속력을 갖는 약속이다.
상대에게 사랑스럽고, 신실하며 진실하겠노라고 하나님과 가족, 그 밖의 주요한 사회 기관 앞에서 약속하는 자리다.
언약은 언제든지 가볍게 파기할 수 있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다. 결혼과 동시에 형성되는 새롭고도 강력한 연합이므로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깨트릴 수 없다.
이혼이 쉬워서는 안 된다.
"누구나 맹세를 할 때는 손으로 자신을 꼭 쥐는 법이란다. 물을 움켜쥐는 거나 매한가지지. 손가락을 펴본들 자신을 되찾을 가망은 전혀 없거든"
약속이야말로 자유를 얻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약속을 하는 당사자들은 서로 상대방을 위해, 또 상대방과 함께 그 기쁨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을 의식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당신은 알 수 없다. 사람을 알아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 사람에 대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사랑하는 거이다.
부부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밑바닥까지 다 들여다보고 장점과 결함을 속속들이 알게 된 뒤에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축복받는 결혼 생활이 될 것이다.
이편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고도 아낌없이 사랑을 받으면 마치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이런 사랑은 허울을 벗겨 주고, 독선을 버리고 겸손하게 하며, 삶이 어떤 어려움을 던져 주든지 꿋꿋이 맞설 용기를 가져다준다.
뜨거운 열정은 결혼을 약속하게 했지만 잔잔한 애정은 세월이 갈수록 그 약속이 더 풍성하고 깊어지도록 해준다.
실제로 무조건적이며 언약적인 결혼은 로맨틱한 사랑을 완성해 준다.
사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요인은 약속에 대한 헌신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지만 우리가 알아챌 것은 이 말씀이 명령이며 감정은 명령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지시할 뿐이며 이것은 주로 일련의 행위를 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과 행위를 구분하지 않으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을 만날 수 있다.
이런 구별이 필요한 까닭은 감정이라는 것이 도무지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망가트릴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까닭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의 심기를 건드리는일을 서로가 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느낌이 없을 떄 도리어 진실하고 지혜롭게 사랑할 수 있다.
반면에 느낌보다 행동 쪽에 방점을 찍으면 외려 감정이 솟아나고 더 깊어지게 된다.
먼저 사랑하듯 행동해 보라.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냐 사랑하지 않냐 고민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마치 사랑하듯 행동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머지않아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면 이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그저 그 사람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행복해지길 바라듯 그 사람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선대한다면 그때마다 조금씩 그를 더 사랑하게 되는,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조금씩 덜 싫어하게 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사랑하면 언젠가는 마침내 사랑스러워진다.
날마다 이어 가겠노라고 약속할 수 있는 것 또한 사랑의 행동뿐이다.
남편도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감정에 대한 지적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행동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바울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행동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좋아하는 감정이 사라지는 날'은 기필코 오게 마련이다.
느낌은 밀려왔다가 또 밀려나간다.
다정하고, 따뜻하며, 기쁘게 해주려는 열심을 실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온유하고, 용서하며, 기꺼이 돕는 행동을 해야 한다.
배우자에게서 별 기쁨과 매력을 느끼지 못할 때에라도(아니, 그럴 때는 더더구나) 사랑으로 행하고 섬기는 데 헌신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도 타락한 인간들을 보시며 '참으로 매력적이니 나를 내어 주어야겠구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잖아. 오히려 고뇌 가운데서 우리가 당신을 부인하고 포기해 버리고 배신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셨어. 주님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셨어.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사랑스럽게 만드시려고 우리를 사랑하신 거야. 배우자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외롭지 않으려고 결혼했다
04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한 몸 되는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5-27)
결혼, 무엇을 위한 것이가?
결혼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결혼이 곧 우정이라는 원리에서 출발한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 2:18)
하나님은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갖도록 설계하셨다.
'혼자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하나님은 '돕는 베필', 곧 친구를 지으셨다.
친구의 으뜸가는 자질은 한결같음이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특히 '고난'을 당하는 동안 그래야 한다.
그런 벗들은 늘 우리의 곁을 지켜 준다.
참다운 친구의 두 가지 특성은 항상성과 투명성이다.
'같은 감정(sym-pathos)', 곧 공감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저절로' 생성되는 차원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다.
"너도?" 하는 탄성이 우정의 핵심이 있다고 말한다.
같은 끈을 잡고 있는 상대를 만나서 투명성과 항상성을 쌓아 가다보면 진실한 우정을 키워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정은 서로를 뛰어넘어 헌신하고 열정을 쏟는 무언가가 있게 마련이다.
서로 비슷한 생각과 관심사를 가졌음을 깨닫는 순간... 우정이 시작된다.
'나랑 똑 같은 진리를 알고 있니?'라든지, 최소한 '나와 똑같은 진리에 관심있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친구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우정을 쌓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려내는 영적인 우정의 모습은 놀라우리만치 근사하다.
우정이란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두 사람이 같은 목표를 향해 나가는 가운데 차츰 깊어가는 '하나 됨'을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영적인 우정은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여정이다.
배우자는 가장 친한 친구이다.
'특별한 친구'나 '가장 좋은 '벗'
주님은 "동기간보다 더 가까운" 궁극적인 친구가 되어 주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넘어지게 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영광스럽고 독특한 존재로 빚어 그분 안에 머물게 하시려고 온힘을 다하신다.
결혼의 목적은 무엇인가? 서로 도와 장차 영광스러운 자아, 곧 하나님이 마침내 이루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바라볼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보좌, 그리고 장차 얻게 될 티도 흠도 없는 거룩한 인성이다.
결혼 상대를 찾을 때는 반드시 서로의 내면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안식하고 '새사람'이 드러나게 하는 과정에 동참하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
부부관계를 이어가게 하는 힘은 배우자를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헌신에서 나온다.
감정의 탱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진 뒤에야 비로소 삶이 잘 돌아갈 수 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좋은 친구이거나 그렇게 되어 가는 상태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거나 풍성한 결혼 생활을 꾸려 갈 길이 없다.
남편, 또는 아내가 단지 연인이나 재정 후원자가 아니라 더없이 좋은 친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부부 사이가 가장 중요하고 만족스러운 관계로 자리 잡을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부부는 모든 관계 가운데 가장 주요하다. 배우자야말로 누구보다 큰 사랑과 에너지, 열성과 헌신을 쏟아야 할 대상이다.
짝퉁 배우자에게 한눈을 팔지 말라.
제아무리 선하고 훌륭한 일이라도 배우자보다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게 되면 부부 관계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
자식을 배우자보다 더 사랑하면 가족의 결속이 틀어지게 되고 결국 온 식구가 고통을 짊어지게 된다.
배우자만이 채워줄 수 있는 우정과 사랑을 자녀에게 바라서는 안 된다.
주님을 결혼 생활의 중심에 두라.
결혼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또는 구원과 많은 부분 닮아 있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신랑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결혼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스도께 삶의 주도권을 넘겨 드린다는 뜻이다.(골 1:15)
결혼 생활은 배우자와 부부 관계를 으뜸으로 여기고,
즉 '짝퉁 배우자'에게 한눈을 팔지 않아야 비로소 정상적으로 작동된다.
행복하려면 많은 재물보다 튼튼한 몸이 더 요긴한 법이다.
결혼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제도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결혼을 인간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관계로 세우셨다.
결혼에는 인생 항로 전반을 좌우하는 힘이 있다. 온갖 어려움과 약점들로 가득한 악조건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결혼 관계가 탄탄하면 나머지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혼에는 이처럼 인생 항로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있다.
결혼에 우선 순위를 부여하는 열쇠는 영적인 우정이다.
하지만 영적인 우정은 다르다. 그것은 하나님을 점점 더 깊이 알고, 섬기고, 사랑하고 닮아 가도록 은 마음을 다해 서로 돕는다.
결혼은 큰일이다.
예수님의 사랑과 지혜, 탁월함이 내면에 자리를 잡으면 저마다 가진 독특한 은사나 부르심과 어우러져 '참 사람', 곧 하나님이 지으실 때 의도하셨던 인간이 되어져 간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목소리로 혼자 힘으로는 그 여정을 마칠 수 없다고 외친다.
연인이자 친구인 배우자야말로 그 엄청난 모험의 가장 적합한 길벗이다.
결혼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함의 문제는 아닐까?
콩깍지가 벗겨졌어도 계속 살아야 하나
05 진실한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5-26)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살게 된 낯선 상대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게 하는 진실의 힘
함께 사는 배우자만큼 파트너를 통해 큰 어려움을 겪거나 상처를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혼을 하고 나면, 남편과 아내는 커다란 트럭을 몰고 상대방의 마음을 오간다. 그러면 치명적인 흠들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결혼을 서로 성장하도록 돕는 관계로 만등러 가는 첫 걸음은 그 안에 내재된 속성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혼은 본질적으로 '진실의 힘', 즉 스스로의 실체를 사실 그대로 드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배우자의 예리하고 폭넓은 비판 앞에선 누구든 기가 질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마음의 죄를 폭로하는 최종적인 주체는 배우자가 아니라 결혼 그 자체임을 알아야 한다. 결혼으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한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화상을 들이대고 목덜미를 잡아채서 똑바로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이 결혼이다.
배우자에게 이편의 잘못된 구석을 짚어 낼 권리를 주라.
제시카가 고상하고 따듯하게 남편을 사랑할수록, 그 역시 아내가 상처받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곁에 있는 남편, 또는 아내가 '보다 나은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안정을 찾는 유일한 길은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고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끊임없이 요점을 되풀이해 강조한다. 아내는 그걸 '경건한 잔소리'라고 부른다.
서로에게 상대방을 책임질 권리를 주라.
다름 아닌 아내의 평가가 사나이라는 의식을 심어 준 것이다.
"칭송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이의 칭찬은 최고의 상급"이다. 더없이 존경하는 대상으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는 것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일이다.
결혼 가운데 드러나는 사랑의 치유력은 거룩한 자녀들 속에서 예수님이 드러내시는 치유 역사의 축소판이다.
남편이나 아내의 지지가 예수님의 사랑과 똑 닮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비를 한층 온전하게 믿고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우리는 배우자가 정서적으로 가장 소중하고 효과적이라고 믿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랑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통할 수 있도록 인간의 모습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상대방이 필요한 방식으로 사랑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적절치 않은 사랑의 언어는 의미를 '거꾸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하라.
주요한 사랑의 언어들을 남용하지 말라.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릇 사용된 언어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사랑의 욕구를 채우는 것은 철절하게 선택의 문제입니다. 배우자가 사용하는 사랑의 언어를 공부해서 자주 구사하면... 감정적인 사랑의 탱크가 늘 가득 차 있게 되어 '홀딱 빠지는' 경험에 대한 강박이 무너져 내린다 하더라도 아쉬워하지 않을 겁니다.
사랑은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창의성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사랑은 반드시 말로써 표현되어야 한다.
파트너의 장점과 은사를 분별해서 솔직한 인정과 칭찬, 감사를 전하라.
우정은 결혼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다.
섬김은 가장 강력한 사랑의 신호이다.
섬김은 가장 실제적이고 시시한 일들에서 비롯된다.
섬김은 배우자를 깊이 존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섬김은 상대방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파트너에게 불편이나 상처를 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꺼이 바꾸기로 결단하고 헌신하는 마음가짐이야 말로 더할 나위 없이 큰 사랑의 표현이다.
매일 서로를 위해 드리는 간구는 여러 면에서 다른 언어들을 한데 묶는 특별한 사랑의 언어다.
남편이나 아내가 늘 진실을 말한다는 확신이 서야만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요약하면 진실과 사랑은 늘 함께 붙어 다녀야 한다.
배우자의 지적을 받아도 거기서 사랑이 감지되기만 하면 마음 놓고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 그래야 스스로의 실상을 직면하고 성장할 수 있다.
해법은 은혜뿐이다.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용서와 회개라는 결혼 생활에 필수적인 두 가지 기술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화를 누르기만 하면 진실을 말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의미다. 하지만 용서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솔직하게 상대방의 잘못을 말한다면 그것이 소금이 되어 분노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아 줄 것이다. 진실과 사랑은 공존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배우자를 용서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선 겸손해야 한다.
내가 상대방보다 낫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용서는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힘들게 된다.
은혜를 의식하는 가운데 이런 힘을 행사한다는 것은 곧 배우자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도록 돕는 길이기도 하다.
신령한 눈으로 배우자를 바라본다는 것은 곧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지극히 일부분이나마 파악한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 달라도 너무 다르다
06 '다름'의 복을 누리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엡 5:22-23)
누군가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내 준 선물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내던지는 것은 지헤로운 사람의 처신이 아니다.
결혼 생활에서 아내가 행하는 순종은 이편에서 주는 선물이지 강요에 의한 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분리시키면서 성숙하는 반면, 여성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면서 무르익는 것이다.
창세기가 설명하듯, 남성과 여성은 서로 철저하게 다르지만 둘이 모여야 완성되는 나머지 '반쪽'이기 때문이다.
성별이 다른 두 인간이 그 '다름'을 끌어안고 서로 헌신하며 희생하다 보면 때로는 아프고 번거롭기도 하지만 결국은 서로가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가장 유익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집안의 머리인 남편이 보여 주는 섬기는 리더십과 아내의 순종이라는 강력하고도 너그러운 선물은 어디서나 견고한 기초가 되며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의도에 부합하는 부부의 모습을 완성하게 해줄 것이다.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하길 원하는 여성이라면 우선 '강력한 조력자'에 어울리는 '섬기는 리더'가 되어 줄 남편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결혼을 사역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장구한 시간과 수많은 문화를 아우르는 텍스트이다.
제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자신이 맡은 역할이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 될 것이다.
part3 결혼은 하나 됨이다
독신은 잘못된 선택인가
07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싱글은 아름답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 7:8)
깊이 있고 균형 잡힌 결혼관을 갖추지 못하면 독신 생활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를 확신하기에 세상에 속한 일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성공을 기뻐하지만 날뛰지 않고 실패에 아파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참다운 기쁨을 보장하시는 까닭이다.
결혼을 추구하지 않는 시기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독신의 은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바울의 글을 보면, 다른 이들을 세우도록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리켜 늘 '은사'라고 말하느느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한 '독신의 부르심'은 내면의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도 아니고 끔찍한 씨름도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라. 그것은 혼자라는 상황을 통해 삶과 사역에서 넉넉한 결실을 거두는 것을 가리킬 따름이다.
나이가 들수록 결혼 문제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라.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
가장 포괄적인 면에서 '매력'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열정은 반드시 배우자를 향해야 한다.
너무 빨리 달아오르지 않도록 주의 하라.
평생 지속되는 사랑에 필요한 것은 감정만이 아니다.
감정에 눈이 멀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거나 불같이 달아올랐다가 금방 식는 것을 피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혼전 성관계를 거부하는 것이다.
로맨틱한 감정을 쌓기 전에 우정부터 쌓으라.
하지만 헌신을 보여 주지 않는 상대의 허수아비 배우자가 되는 실수도 피해야 한다.
공동체의 권면을 대폭 받아들여서 충실히 따르라.
기본적인 원칙은 늘 타당하고 또 중요하다.
왜 잠자리는 부부끼리만 해야 하나
08 성생활은 결혼의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 5:31)
성교는 우리 몸뿐만 아니라 마음, 곧 속사람에도 영향을 미친다. 죄는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이 무질서해진 상태를 말한다.
섹스는 결혼의 울타리 안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결혼은 두 사람의 연합이 너무도 깊고 오묘해서 사실상 새로운 한 인간이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연합'으로 번역된 언어는 '견고한 언약이야 게약'을 뜻하는 말이다.
성경은 배우자를 '언약의 파트너(잠 2:17)라고 부른다. 언약을 맺는 결혼식 날은 모두의 축하와 축복 가운데 신랑 신부의 심령이 더욱 충만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불씨를 다시 지피고 언약을 새롭게 하는 과정이 필요해 진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존재인지 되새기로 다시 자신을 내어 주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남편과 아내의 성관계는 그러한 뜻을 살리는 독특한 행위다.
서로에게 "나는 온전히, 영원히, 그리고 오로지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주님이 지정하신 방식이란 뜻이다.
성은 언약을 새롭게 하는 기능을 한다.
'한 몸'이란 남성과 여성이 삶의 모든 차원에서 인격적인 연햡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배우자가 아닌 상대와의 성관계는 윤리적으로 그릇된 행위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유해하다는 것이 성경의 시각이다.
삶 가운데서 예수님이 베푸시는 '배우자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성관계는 전폭적인 헌신의 관계다.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면서 죄가 빚어낸 마음의 빈자리는 예수님과 마주할 때만 메워질 수 있다.
이치에 맞고 이로울 때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순종이 될 수 없다. 동의할 수 없을 때에라도 누군가에게 권위를 양도하는 것이 순종이다.
하나가 되는 경외감만으로 충분하다.
먼저 친밀감을 향상시키라.
성적 연합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에필로그
사랑이 결혼이라는 집을 떠받치게 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혼이라는 집을 떠받치는 탄탄한 기초가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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