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부 하나님_
탕부라니..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제목에서 약간의 움찔함을 느꼈더랬다.
탕진_이라는 단어가 버뜩 떠올라서,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접근으로 다가왔던 것은 나 뿐일까..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면서_
탕부 하나님이 맞구나.. 결국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던 책.
'돌아온 탕자'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진 누가복음 15장의 말씀을 통해 풀어가는 책이다.
아들들을 위해 사랑을 탕진 하시는 하나님_
몽땅 탕진하고 돌아오는 둘째 아들의 관점에서 우리는 줄곧 설교를 들어왔는데,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는 첫째 아들의 관점에서도 사랑을 탕진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 한다.
이 책을 계기로
혹, 나의 모습이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드는 착한 첫째 아들은 아닌가.. 하고 깊이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역시, 팀 켈러구나.. 하는 생각.
도대체 이런 영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부럽다!
들어가는 말
흔히 '탕자'로 번역되는 문구의 형용사 'prodigal'은 '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주시는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탕부'이시다.
하나님의 무모한 은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요,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며, 이 책의 주제도 바로 그것이다.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누가복음 15:1)
1. 나는 왜 예수 앞에 나오는가
오늘날도 두 부류가 예수님 주위를 맴돈다
예수님이 모든 성전을 종식시키는 성전이셨고, 모든 제사장을 종식시키는 제사장이셨으며, 모든 제물을 종식시키는 제물이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누가복음 15:11)
2. 우리도 '잃어버린 두 아들'처럼 질주한다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대개 우리는 사랑을 거부당하면 화가 나서 복수한다. 거부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최대한 거둬들여 자신의 상처를 줄인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들을 줄곧 사랑하며 괴로움을 견딘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그 어떤 죄나 허물도 다 사면해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생은 아버지 집에 "양식이 풍족한"(17절) 줄은 알았으나 이제 은혜도 풍족함을 깨달았다.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시된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 어떤 공로나 뼈저린 참회로도 얻어 낼 수 없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수용은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이다.
1막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보여 주었다면, 2막은 그 은혜의 값비싼 대가와 이 이야기의 참된 절정을 보여준다.
"내 말대로 자존심을 버리고 잔치에 들어오너라. 선택은 네 몫이다. 들어오겠느냐 말겠느냐?"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누가복음 15:29)
3.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죄'는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것 그 이상이다
비유에 나오는 형제를 통해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복과 만족을 찾으려 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길을 보여 주신다. 하나는 도덕적 순응의 길이고, 또 하나는 자아 발견의 길이다.
비유 속의 형은 도덕적 순응의 길을 대변한다.
비유 속의 동생은 자아 발견의 길을 대변한다.
두 아들을 보통 기준에서 보면 하나는 '못됐고' 하나는 '착하지만' 아버지와 멀어져 있기는 둘 다 똑같다.
비유 속의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못된 아들은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는데 착한 아들은 그렇지 않다. 창녀들과 놀아난 사람은 구원받는데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은 여전히 잃어버려진 상태다.
그와 아버지를 갈라놓은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이력에 대한 교만이다. 그를 아버지의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게 막는 건 그의 악이 아니라 의다.
자기 뜻을 관철하는 방식만 달랐다.
다시 말해 두 아들 모두 반행했다. 방법상 하나는 아주 못되게 굴었고 또 하나는 지극히 착했을 뿐이다. 둘 다 아버지의 마음을 멀리 떠난 잃어버린 아들이었다.
하나님께 방항해 그분과 멀어지는 길이 두 가지라는 뜻이다. 하나는 그분의 규율을 어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규율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힘써 순종하는 게 오히려 그분께 반항하는 하나의 전략이 될 수도 있다니.
죄,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서는 것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사람들도 대게 아주 도덕적으로 살지만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그분을 통제하고, 자기네 생각대로 그분께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당신도 하나님께 순종해 착한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이유로 그분이 당신에게 복과 도움을 베푸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당신을 돕는 자 내지 감화를 주는 모본은 될지언정 당신의 '구주'는 아니시다. 당신 스스로 구주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신도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 든다면 당신의 모든 도덕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죄란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게 아니라 구주요 주님이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올라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들이 실세이고 교만한 사람들은 퇴물이다'라고 말씀하신다(눅 18:14)
"여호와께서는 ...... 겸손한 자들을 돌보시며 교만한 자들을 멀리하신다"(시 138:6)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누가복음 15:28)
4.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 불순종만큼 위험하다
맏아들도 둘째 못지않게 '잃어버린 존재'다
형은 화가 났다. 그가 하는 말마다 원망이 뚝뚝 떨어진다.
형들은 자신이 착하게 살면 삶이 행복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이 기준에 부합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이 평탄한 길을 주실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당신도 선행과 반듯한 삶을 공로로 내세워 하나님께 행복한 삶을 얻어 내려 한다면, 분노에 삼켜지고 말 것이다. 삶이란 결코 우리의 바람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원망은 당신 탓이다. 그 원인은 다른 사람의 형통한 삶이 아니라 당신이 자신의 행위로 삶을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상대를 향해 우월감을 품은 상태에서 그 사람을 용서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음이 끌려 자원하는 게 아니다. 노예는 두려움 때문에 일한다.
거짓말하거나 속이면 발각될 수 있고 그것이 기업에 악 영향을 미친다. 자신이 정직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면 직원들의 사기가 올라가 경쟁 업체들보다 한 수 위라고 느끼게 된다.
'진실을 말하라. 그게 너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삼가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을 위하고 진실을 위하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직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두려움 대신 사랑이 동기가 된 사람은 법도 잘 지킬 뿐더러 부단히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여 기업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운영한다.
복음, 즉 진정한 기독교는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
"얘,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누가복음 15:31)
5. '진정한 형'이 날 찾으러 이 땅에 오셨다
형이 찾아야 하고, 형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마음속 역동이 어떻게 두려움과 분노에서 기쁨과 사랑과 감사로 바뀔 수 있는가?
하나님의 주도적 사랑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지 않으시는 한 우리는 절대로 그분을 만날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찾으시는 방식이 각기 판이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형을 구원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자신의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이다. 형의 문제는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태도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이력을 내세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빚을 지운다. 그분과 그들을 통제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게 만든다.
그의 영적 문제는 자아상의 근거를 성취와 행위에 두는 데서 비롯되는 지독한 정서 불안이다.
바리새인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주된 장벽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그들의 저주받은 선행"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
용서란 가해자에게는 값없고 무조건적이지만 당신 쪽에서는 큰 희생을 치러야 한다.
자비와 용서는 가해자 쪽의 공로 없이 거저 베풀어져야 한다. 공로를 요구한다면 이미 자비가 아니다. 그러나 용서를 베푸는 쪽에는 언제나 대가가 수반된다.
그분은 우리를 찾으러 옆 나라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낮은 땅까지 오셔야 한다. 한정된 금액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라는 무한한 대가를 기꺼이 치러 우리를 하나님의 집안에 들이셔야 한다. 우리의 빚이 그만큼 막대하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속의 불신을 허물어뜨린다.
"먼 나라에 가"(누가복음 15:13)
6. 이 세상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여정이다
그날에 우리는 아버지 집, 영원한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하도 절망적인 희망 같은 게 느껴져서 침대에 쓰러져 그것을 막아 내고 싶을 정도였다. ...... 나는 가망 없는 기쁨이나 부질없는 약속에 자상을 입어서 혹은 아침이 너무 아름다움으로 충만해서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분리된 평화> 중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평범한 삶에 희망을 주신다.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누가복음 15:25)
7. 아버지 잔치는 이미 시작됐다, 들어가 누리라
예수 복음은 지금, 여기서의 삶부터 바꾼다
그분이 우리에게 '무죄' 평결을 확보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죗값을 치를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구원은 잔치다. 그래서 그분이 이루신 일을 믿고 그 안에 안식하면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마음에 실제로 거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저 '영으로' 구원받으신 게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셨다. 하나님은 몸과 영을 둘 다 지으셨고 몸과 영을 둘 다 구속하신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고로 나는 순종한다'
일단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해서 그것으로 복음의 메시지가 끝났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름다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그분은 우리의 궁극적 남편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신부"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은 믿음으로만 남아 있지 않는다'. 어떤 행위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얻어 낼 수 없다.
희생적으로 우리를 섬기신 분을 참으로 믿고 신뢰한다면, 우리도 희생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로 변화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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