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4주 특별집회를 통해서 손장로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고, 그 동안에 막혀있던 것들이 많이 뚤려진 느낌이다. 4주 특별집회 완주를 하고 받은 책..
치유와 권능.
손장로님의 첫번째 책이다.
하나님의 운행과 예수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능력,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특권. 그것들이 왜 누군가에게는 나타나고 또 누구에겐 나타나지 않는지,
모든 것들을 말씀으로 풀어놓은 책이다.
책을 이렇게 정독하며 읽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철저하게 말씀을 통해 풀어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더 궁금해 졌고, 무엇보다 성령하나님에 대해 궁금해 졌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킹덤빌더로서의 삶에 대한 성찰과 내 삶을 들여다 보게되는 계기가 되어 너무나도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여러 방면으로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가운에 세워질 수 있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은사와 은혜, 그리고 축복이 기대된다.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소망하게 되어 감사하다.
[밑줄긋기]
믿으라, 선포하라, 경험하라!
"사람들에게 사역하는 것보다 하나님 당신에게 더 사역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삶은 변화되지 않을까?
대부분의 경우, 이 세상이 아닌 교회 내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 하거나 그 법칙을 적용하고자 하며,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보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것 같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은 하나님 영광이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에 어떻게 그 나라의 법이 적용될 수 있겠는가?
이 시대에 하나님이 이 땅에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기적은 그의 나라를 위하여 살기로 작정한 자에게 주어진 무기지 요청하는 모든 자에게 차별 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다. "믿는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막 16:17)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지도다.
우리 영혼에 찾아오신 성령님의 임재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학자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없다.
1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롬 12:2)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것을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영적인 세계를 열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빈 그릇에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기름부으심의 비밀이다.
"여호와의 눈은 오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 2:17-18)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1-3)
신앙생활에서 은혜없이는 내면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있을 수 없고, 기쁨이 없다면 영적으로 자유함이 없다.
회개의 깊이는 은혜의 깊이와 동일하다.
회개는 죄를 끄고 은혜의 불을 켜는 스위치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단지 우리가 구원받을 때나 죄를 지었을 때 고백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것이 있다는 말이다.
"회개는 마음을 바꾸다"라는 뜻으로 타락 전의"본래 상태로 되돌아가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본성적 자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와 죄이 영향력으로 인하여 심각하게 금이 갔다. 그 결과 아담의 후예들 안에 모든 죄들의 뿌리인 원죄가 죄의 근원으로 항존하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끊어짐으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영적인 교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을 육과 혼적인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되었다. 즉 의존자에서 자존자로, 하나님에게 인정받는자에서 세상에서 인정받는 자로, 영이 육을 지배하는 자에서(안에서 밖으로의 삶) 육이 영을 지배하는 자로(밖에서 안으로의 삶), 존재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행위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자로, 사랑의 충족에서 갈망의 존재로, 영혼의 사랑을 육신의 사랑으로 대체하는 자로, 하나님 중심의 삶(하나님의 영광으로 보호를 받음)에서 자기중심의 삶(자아로 자기보호)을 사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게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8)
성경은 회개가 우리를 자유, 진리, 생명이 있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매우 귀중한 천국열쇠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자존자적 성향)으로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난 어떠한 일도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어떤 일이라도 짝사랑으로 인한 일방적인 것이라면 '죽은 행실(dead work)'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살아 있는 행실(living work)'은 성령에 의지하며, 육체로 자랑하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3)
회개는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속적인 과정이다.
실은 회개의 횟수가 많다는 것은 성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하는 삶의 양식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내 삶을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못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 이상으로,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네 종류의 회개
1. 구원을 얻기 위한 전형적인 회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2. 우리의 삶 속에서 스스로 저지른 죄와 죄악된 행실로부터 돌아서는 회개
"하나님과 같이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는 신이 어디 있겠는가?"
죄의 깊이와 상관없이, 자주, 그것도 아주 많이....
3. 이 세상의 법칙으로는 정당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법칙으로 불법에 해당된느 것에 대한 회개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하나님 나라의 법칙으로는 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적 반응' 대신에 '영적 반응'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적 반응 대신에 영적 반응을 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우리가 행한 육신적 반응으로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한 영적 반응으로 평가하신다.
4. 죄를 짓는 것을 돌이킨다는 의미에서의 회개가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의 회개다.
회개(repentance)
repent라는 말의 의미는 re(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며)+pent(빌딩의 최상층을 이르는 penthouse와 같은 말)
회개한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네 번째 회개는 자신의 세계관을 포기하고 성경적 세계관으로 자아를 새롭게 만들기 위한 회개이며, 이 회개는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 작업니다.
새로운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천국으로 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그의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이 천국의 삶이 나타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자신을 통제함으로 겸손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임으로써 '예수의 인격'이 나타나는 것이다.
진정한 성령충만함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과정을 지나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죽으라! 그러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죄이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당신이 어떤 문제로 지금 묶여 있고 고통받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죽었다고 선포하라. 당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이 그리고 사단의 영이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선포하라. 동일한 죄를 짓더라도 죽었다고 선포하라.
내가 죽었기 때문에 나는 그 죄에 대해서 더 이상 책임이 없으며, 그 죄 값은 예수와 해결하라고 선포한다.
승리의 비밀은 죽고 난 다음에 '난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죽엇다고 선포하는 것에 달려 있다.
"영적인 능력은 인간의 동의에 의해서 흐른다."
우리의 입술을 통한 선포는 하나님의 능력을 내 안에 풀어 놓는 스위치다.
언약은 불변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언약의 효력은 지속적인 관계에서 나타난다.
승리하는 생활의 지속은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매순간 믿음을 통한 친밀한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결국 믿는 자에게 변함없는 승리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고 있는 동안에 한해서며, 더구나 그때뿐이다.
율법이란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 그리고 법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성품을 말한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이해하려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 된다.
율법의 의미에서 볼 때 죄의 많고 적음을 떠나 죄는 죄일 뿐이며, 작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우리의 삶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 삶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날마다 율법을 이루는 삶이 되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혼자 힘으로 결코 살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단지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신다면 내 것을 포기할 때 그분이 자연스럽게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한 뒤에는 그분의 나타남을 보고 즐거워하기만 하면 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삶의 기본에는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뿌리 박혀 있어야 한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끌어 가시는 일에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
정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우리가 어떻게 순종해야 우리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더 분명히 나타날 수 있을까?'이다.
그분꼐서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의 결과인 것이다. 이 삶은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는 좋은 삶이란 설령 세계 최고의 삶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고 난 뒤에 가는 곳일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세상에 이미 도래한 곳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승리하기 원한다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as it is in heaven)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도록 해야 한다.
'천국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입술의 선포로 이 땅에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충돌하도록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성전이 될 때(성령충만한 삶을 살때), 우리가 거하는 장소와 밟는 땅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된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 법칙이 비로소 적용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문제는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은 채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려는데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서 그분의 뜻을 구하지 않으면,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세상의 뜻일 뿐이다.
이 땅에서의 변화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생긴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이 땅에서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루게 할 수 있는가?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거시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거 더하시리라"(마6:33)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상처는 우리가 언젠가 심었던 씨앗의 열매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법은 언제나'always and is"로 적용된ㄷ. 하나님의 법은 만세전에 제정되었으나 세상 끝날까지 함꼐하며, 항상 현재로 존재하며 적용되어진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
1. 보호의 법칙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거할 때는 천국 시민권자로서 특권이 부여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2. 경제의 법칙
중요한 것은 주신 달란트를 얼마나 충성되게 활용했는가이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을 주시고, 신실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 주신 것도 빼앗아 버린다.
3. 거래의 법칙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믿는만큼 베풀어 주신다.
4. 자선의 법칙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할 때 반드시 보상이 뒤따른다.
5. 과세의 법칙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과세가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분이 주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 창고에 다시 넣기를 원하신다.
6. 교육의 법칙
하나님 나라에서의 교육은 삶 그 자체이며 선생님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7. 믿음의 법칙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3-24)
8. 용서의 법칙
하나님이 우리의 빚을 먼저 갚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죄진 자를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한다.
9. 대체의 법칙(무진공의 법칙)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로 성령 아니면 사단이지 진공이란 없다.
10. 닮아감의 법칙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자신도 판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자신도 동일한 일을 행하게 된다.
11. 심고 거두는 법칙
심고 거둘 때 각기 종류대로 지으시고 생산한다. 즉 콩 심은 데 콩이 나며, 팥 심은 데 팥이 난다.
심는 계절과 수확하는 계절은 서로 다르다(기다림의 법칙). 수확을 기대한다면 반드시 미리 심고 기다려야 한다.
진리는 분명히 처음은 싹이요, 다음은 이삭이요, 마지막은 충실한 곡실이라고 말씀하신다.
수확은 배가의 법칙에 따른다. 한 알의 씨앗이라도 좋은 씨앗을 심었다면 수확 때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를 수확하게 된다.(고후 9:10)
모든 생각과 감정은 마음에서 나온다.
어떤 영적 존재로 부터(예를 들면, 성령, 사단의 영, 자기의 영)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마음의 생각과 감정이 달라진다.
우리의 영혼육을 동일하게 중요시할 때 이 땅에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다.
즉 마음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자궁(마치 씨앗이 뿌려지고 생명이 자라나 인격체를 방출하는 산모의 자궁과 같은)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인생은 자기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헛된 몸부림일 뿐이다.
세상(사단)의 문을 열어 놓아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란 불가능하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성령님께 지속적으로 열어 놓을 떄 말씀이 살아 움직여 능력이 되고(히 4:12-13), 성령님이 우리 몸의 행실을 죽임으로(롬 8:13) 우리가 의존자적인 그리스도인의 삼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죽고 나서 가는 천국과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삶"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나라 가기 전까지 안전하게 보호하는 장소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탈환하는 전초기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의 백성이 땅을 디디고 있는 그곳에(교회 밖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깃발이 꽂히도록 하고, 교회는 그 땅을 정복하는 데 물질적, 인적, 영적 자원을 지원하는 기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은 평신도의 역할이지 성직자의 역할이 아니다.
우리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충돌시켜야 한다.
영적 전쟁은 후퇴아니면 공격뿐이다.
우리의 직업과 머무는 그곳에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룰 터인 것이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삶은 급격히 변화될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 초석이 된느 두가지는 '죄의 문제'와 '자아의 정체성'이다.
죄는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법으로 볼 떄 죄의 많고 적음을 떠나 죄는 죄일 뿐이며, 어떤 적은 죄라도 지으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정체성'은 우리의 현재 위치나 생각이나 삶의 방식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한느 것은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열매에 해새 알아야 할 것은, 1)우리가 만들 수 없다는 것,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맺히는 것(not producting but bearing)이며 2)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흔히들, 성령의 열매를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생명나무의 과실과 같이 남을 위한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서 그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온전히 조명되는가에 달려 있다.
만약 뿌리가 생수에 닿아 있지 않으면, 쓴 뿌리(bitter roots)는 자신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더럽힌다.
온전한 내적치유는 내면의 막힌 쓰레기를 치우는 것뿐만 아니라(겉사람 죽이기)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생수가 흘러나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케 해 주는 것이다(속사람 새롭게 하기).
진정한 내적치유는 치유, 회복 그리고 영적 성숙을 포함한다.
생수를 흘려보내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 풍성한 열매와 은사가 맺히는 삶이다. 자신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치유해 주는 삶을 산다.
변화되지 않는 이유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배움이 아닌 공허한 배움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배움에 집착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충족감은 무엇인가를 집어넣는 데 있지 않고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것에 있다.
공허한 배를 충족시키기 위한 배움보다는 골방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거룩한 낭비'가 필요하다.
변화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배우기만 하고 익히지 (self-study&practice)않기 때문이다.
익히지 않고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가르침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자식의 전달이 아니라 이론과 실제를 모두 보여 주어야 한다.
이미 우리는 새로운 심령(new heart)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엣날 생각(old thinking)으로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 생각을 통제하는 법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익혀라.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아는 것이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불행한 이유를 밖(환경)에서 찾으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실제로 불행의 대부분 원인은 자기 안(생각)에 있다.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지 않는다면 과감히 포기하라.
2부 믿는 자에게는...(막 9:23)
이 땅에서 믿음을 쓸 수 있는 한도는 아버지와의 친밀함의 정도에 달려있다.
믿음으로 행한 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한다는 것이고, 보이는 것을 좇아간다는 것은 감각에 의한 이성의 권위에 순종한다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내가 취하는 마음(mind)의 어떤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heart)에 나누어주시는 은혜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은혜의 선물이 있어야 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God saved you by his special favor when you believed. and you can't take credit for this, it is a gift from God).
have faith of God, have faith in God
즉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거듭나게 된다. 물과 성령으로 난 자만이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 들어간다(요3: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만이 이 땅을 새롭게 볼 수 있다. 이 땅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자만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하며, 천국시민 혹은 대사의 삶을 살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어려움과 장애를 경험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어려움이 닥쳐올 때 그것을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가는 디딤돌로 사용하는가 혹은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는 걸림돌로 사용하느냐이다.
사람들은 환경이나 다른 사람의 행위(이것을 '외부자극'이라고 하자)에 이해서 자신의 반응, 즉 태도가 결정되어지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안에 일어나는 반응이 외부자극에 좌지우지 되어선 안 된다. 내 심령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반응해야 한다.
믿음이란 외부자극에 대한 감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반응이다.
계시적 믿음의 표현은 외부자극에 대한 영적 반응이다.
제자들의 반응은 자극에 따른 자연스러운 '육신적 반응'이었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영적인 반응'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환경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마귀를 믿은 믿음이며, 불신이다. 영적인 어떤 실체도 우리의 동의 없이는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두려움은 육신이 우리에게 억지로 짐 지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바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것에 대한 체험적 확신이다.
결국 능력과 권세가 있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선포되지 않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진정한 믿음은 믿는대로 선포하는 데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 따라 역사하시지 않고 우리 입술로 선포되는 대로 역사하신다.
진정한 믿음은 당신이 믿는 바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에게 실제로 맡기는 것이 바로 믿는 대로 행한다는 의미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진정한 믿음은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믿음은 행동이다. 행동 없는 믿음은 한 면이 지워져 그 가치를 잃어버린 동전과 같다.
기적이 믿음에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적을 이끌어 낸다.
매일의 삶 속에서 보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우리와 하나님과이 접촉은 언제나 현재이기 때문에 믿음은 언제나 현재시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표적과 기사는 과거에 우리를 위해서 이미 행하신 일로서 오늘 지금 현재 여기(now and here)라는 시공간에서 믿음이라는 도구로 청구할 때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기도는 과거에 예수님이 이루신 일들을 현재의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Therefore I tell you,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believe that you have received it, and it will be yours).
기도하는 것은 현재이나, 일어난 것은 과거이다. 즉 믿음이란 과거에 일어난 것을 현재로 취할 때, 그 가시적인 결과가 미래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듣고 말하는 것이 믿음에 영향을 미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7)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짐 4:23)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문제들에 마음이 빼앗겨 믿음이 홀로 남게 하지 말라.
매일 피어나도록 싸워야 할 '믿음의 선한 싸움'은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확신과 믿음보다 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 더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에 대한 믿음이 훨씬 크다는데 있다.
계시적인 믿음은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그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이다.
순종이야 말로 계시적인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구원과 치유에 있어서의 믿음은 동일하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예
당신이 구원받았음을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은 어떤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며, 믿는 그 순간부터 당신은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당신은 치유함을 받았습니까? 예
어떻게 아십니까? 내 몸의 통증과 상관없이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치유도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믿기 때문이다. 구원도 계시적인 믿음에 의해서 받는 것처럼(고전 12:3) 치유도 계시적인 믿음으로 의해서 일어난다.
기도의 열쇠는 하나님의 뜻대로(하나님의 법칙대로)구하는 것에 있다.
상황을 해결해 줄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라. 그 약속의 말씀에 의거해서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 이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선포는 내가 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 명령하라 그리고 꾸짖으라. 물론 간구하는 기도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믿음의 기도는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기도이다.
권세를 가지고 선포함으로 환경이 당신의 믿음의 말씀을 다라오도록 하라.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구한 것을 먼저 믿어야 한다. 이것이 기도 응답의 원리이다.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먼저 용서해야 기도가 응답된다.
문제를 기도하지 말고 소망을 기도하라. 당신이 문제를 붙들고 있는 한 하나님의 손은 묶여 있다.
기도할 때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갈망한 내용을 분명히 믿음의 눈으로 그려야 한다.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라. 당신의 믿음의 눈으로 본 그대로 이루어주실 것이다.
성령에 의한 확신, 즉 내적 평안이 올 때까지 기도하라.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이 예수의 피 값으로 사신 밭이다.
그 밭에 믿음으로 씨를 뿌리고,
기도로 가꾸며,
성령으로 물을 주고,
행함으로 가지치기를 하면,
때가 이르러 열매를 맺을 것이다.
3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행 1:8)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계시는 실체며, 인격이시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knowing about Him) 지적 사유를 통해서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knowing Him) 인격적인 만남에 의해서이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을 삼위로 경험하며,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신 인격체다. 성령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성령님은 전능하시다. 성령님은 사랑이시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신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님은 영원하시다.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하신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영적 은사를 주신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신다. 성령님은 모욕을 당하실 수 있다. 성령님은 거절을 당하실 수 있다. 성령님을 소멸될 수 있다.
성령님의 임재를 내주, 세례, 충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령님의 내주(dwelling:거하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할 때 성령님이 우리 속에 거하심을 말한다.
성령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와 생각을 항상 존중하신다. 즉 우리가 의지와 생각으로 성령님께 우리를 내어드린만큼 인도하신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 자라을 의지적으로 그분께 내어드리지 않는한 우리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자아충만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한편 성령님은 무소부재(편재하심)하지만(with us)특정 장소, 특정 시간에 강력하게 우리를 찾아오실 때(임재하심)(upon us)우리는 성령세례(baptism by the Holy Spirit)를 받게 된다(in us).
성령님의 내재는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믿음으로 취함), 성령세례가 임할 때는 일반적으로 다양한 현상이 나타난다.
성령충만함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충만함이다. 성령충만한 상태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삶을 말하며, 이런 삶 가운데 기름부으심이 임하면 비로소 사역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령님에 의해서 온전히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 때,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gift)와 열매(fruits)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은사는 외적인 능력으로, 열매는 내적인 인격의 성숙으로 나타난다.
성령의 소욕에 온전히 사로잡혀 날마다 하나님의 성전인 마음을 지키고 심령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왜 성령체험을 하려는 것인가?
무엇보다 말씀을 깨닫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다. 말씀은 우리가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계시하셔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를 닮아가는 삶이 아니고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자신을 포기하는 만큼 예수님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다.
이 땅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다.
능력과 열매를 가지고 선교하기 위해서다.
성령님은 능력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한다.
성령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나의 감정이나 육체로 임하시지 않고 나의 영으로 임하신다.
성령님이 나에게 온전히 임하시도록 자신의 죄와 더러움을 비우는 기도를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령님이 나의 삶을 온전히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
성령님은 실체를 규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오셔서 본래 하나님이 목적하신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마귀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우리의 죄 값을 이미 지불했다는 것과 아버지가 자녀인 우리를 예수님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이 세상에서 살 동안 당신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었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은혜다.
성령 안에서 안식하는 현상을 갖기 위해서 어떤 인위적인 방법도 시도하지 말라.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악한 영도 정체를 드러낸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나타나실 때마다 사람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께 쓰임받기 전에, 먼저 성령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식이다.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충만한 것은 아니다. 성령세례는 성령님이 강력하게 임함으로 우리의 인격과 행동을 일시적으로 지배하심을 뜻하는 반면, 성령충만은 성령님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의 결과로 생긴 은사와 열매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삶을 말한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성령에 취하여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계속 걷는다. 성령을 좇아 걸으며, 사랑가운데로 걸으며, 빛 가운데로 걷는다.
성령충만한 사람도 성령에 취하면 성령이 시키는대로 말한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난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의 향기다. 이 향기는 사람의 외모나 지식이나 권력이나 몸에 바른 향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예수님의 성품이 우러나는 향기로서 사랑, 겸손과 온유, 기쁨, 긍휼이다.'
성령의 향기는 맡을수록 주위를 맴돌고 게속 함께 하고 싶은 향기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절치 않은 모든 죄들을 깨끗게 하시고, 더 깊은 친밀함으로 인도하시며, 진정한 순종이 있는지 시험하기를 원하신다.
진정한 영적 전쟁은 성령세례 후부터다. 이 전쟁을 믿음으로 이겨야만 하나님 보좌 앞에서 날마다 교제하며, 세상으로 나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영적 전쟁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작되지만 승리는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나타남에 달려 있다.
성령충만한 삶은 마귀의 공격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알고 이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4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막 16:18)
하나님은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은 그분의 긍휼과 자비의 표시
"치유는 하나님이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날 치유하기를 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 받으셨다.
우리의 모든 약함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 해결하셨음을 믿는다.
치유는 예수님의 대속에 있다.
치유에 있어 신학적 성숙과 믿음의 성숙은 짝을 이룬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치유하셨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인 우리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고 싶어 하신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셨고, 지금은 성령님을 통해 말씀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맺어진 언약적인 관계
하나님은 특별히 신유(모든 표적과 기사도 포함되지만)를 통하여 그분의 살아계심과 아버지 되심과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관심을 더 알리고자 하시며, 그 분앞으로 더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가 아닐까?
첫 번째는 좀 더 온전한 영혼육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령가 진정으로 예배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이다.
우리의 세계관이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씨앗을 심는다 해도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는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믿고 행하지 않는다면, 치유역사를 통한 예수님의 영광은 볼 수 없다. 따라서 병든 자들을 위해서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세속적 세계관'에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려는 훈련이며,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의식적으로 내 삶에 적용하려는 회개다.
'하나님의 뜻대로'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그것으로 인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치유가 하나님의 뜻이라는확신이 생길 때야 비로소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치료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치유하실 것'이라는 믿음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자신의 이성과 경험에 기초한 믿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임재함과 그분의 방식에 순종하는 믿음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의 마음에 감동감화를 주신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포기함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된다.
자신의 교만을 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 아피으로 나아와야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문제를 내려놓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마 6:33), 즉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그분의 능력이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판단하고 해석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믿고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는 일곱 전의 합리성에 대하여 자신을 이해시키지 않고 말씀을 말씀대로 받고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의 치유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질병을 치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온전한 산제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으며, 엘리사는 그 일을 온전히 감당한 것이다.
성령님은 늘 우리를 돕기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의 현장 속으로 들어간 것이며,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은 상식이 된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때 기사와 이적은 오늘도 일어난다!
기적을 기대하라고 말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지 말고 들어보라고 말하라.
믿음으로 순종하라고 말하라.
- 믿음은 믿는 대로 행하는 것
- 믿음은 항상 현재, 여기에 역사한다
- 믿음은 질병(현재의 고통)이 아니라 말씀(치유자 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 진정한 믿음은 믿음대로 순종하는 것
치유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태도를 보신다.
'할 수만 있다면'의 믿음은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치유 능력이 온전히 이뤄지기 위해서는 이 약한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믿음으로 오는 자에게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듣는자로 하여금 속이 시원하게 말씀하셨다.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그의 약한 믿음을 꾸짖거나 핀잔을 주지 않고 격려하셨다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원하시면', '불쌍히 여기소서'의 믿음이 예수님께서 주도권을 이양한 믿음이라면, '내가 하기만 하면', 다음에 언급할 '내가 개라 할지라도'의 믿음은 주도권이 예수님께 있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있다.
앞의 세가지 믿음은 예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없는 반면, 뒤의 두 가지 믿음은 이미 예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것에 기초하여 자신의 의지로 취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놀라운 믿음 아닌가!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다.
여인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지만, 그분과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채, 자신이 믿는 대로 행동함으로 치유를 받았다.
치유를 위한 믿음에는 사람들의 믿음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상, 즉 예수님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ㅣ우리의 믿음이 적다고 해서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이 가진 능력이 약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를 그분의 현존 앞으로 가져오는 것과 그리고 그 문제를 요청하는 것이 이 메시지의 핵심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1) 예수님의 현존 앞으로 가져오는 것, 2)에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더불어 3) 예수님이 치유하신다는 믿음이다. 4) 우리는 온전히 치유의 통로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긍휼로 치유하시고, 믿는 자는 믿음을 보고 치유하신다."
의사나 약은 주로 질병의 징후를 치유하지만, 하나님은 질병의 원인을 치유하신다.
잘못된 믿음을 버리고 말씀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라.
-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자녀다.
- 하나님은 나를 기꺼이 치유하고자 하신다.
- 나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 하나님은 나를 온전케 하셔서 찬양과 경배 받기를 원하신다.
- 하나님은 항상 모든 병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O). VS 하나님은 항상 모든 병자를 치료하시지는 않는다(X)
- 두 가지 믿음을 기억하라(자기 경험적 믿음과 계시적 믿음)생각과 이성을 뛰어넘는 믿음을 가지라.
치유에 관한 성경 구절을 읽고, 광경을 믿음의 눈으로 그려보라.
예수님이 주시는,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보라.
보고 소망을 품으라. 성령 안에서 상상하라. 내 문제와 처지를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실 새로운 소망을 선포하라.
하나님을 높이라.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며, 영광이 임할 때 하늘문이 열리고 기사와 이적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할 때 그분이 가장 기뻐하신다.
기도하라. 나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하라.
증언하라.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념책에 내 이름을 올리는 것과 같으며, 또 다른 기적을 예언하는 것과 같다.
약이나 의술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리고 기도하면서 의술을 사용하라. 하나님이 병든 자를 치유하실 때 의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실지라도 결국 치유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5부 뱀과 전갈을 밟으며...(눅 10:19)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혈가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다.
창조-타락-구원-영화라는 구속사적인 선상에서 천사장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 관점을 통해서 우리의 위치를 찾아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또한,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님도 처음부터 말씀과 함께하셨다.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셨으며, 인간뿐만 아니라 천사도 지으셨음을 알 수 있다.
흙을 재로로 인간을 만드셨지만,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a living person)이 되도록했다. 생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분의 생명과 본질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의식(God-consciousness)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할 것과 더불어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명을 다스리게 했다.
비록 이 땅이 인간에 의해서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을 통해서 회복시키고자 하신다. 왜냐하면 이 땅에 대한 권한을 인간에게만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죄악이 날로 관영하는 이 세상에 대해서도 '무심한 하나님'처럼 끝까지 참으시는 이유이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이유이고, 지금도 하나님을 향하는 자녀에게 능력을 주시기를 그렇게도 원하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아니라 처음 창조하셨던(하나님의 생기를 가지고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음)그 자녀들을 통해서 이 땅을 다시 회복시키기를 원하신다(롬8:19-22)
우리는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존재이며, 단순히 이 땅을 다스리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곧 법이며, 죄는 하나님의 영광, 즉 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먼저 거절하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자녀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들의 깨진 마음을 회복시키고 다시 그들과 교제하기 위해서 동물의 피로 그들으 덮어주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둘째 아담을 보내실 계획을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를 에덴의 동산 밖으로 쫓아 내셨지만, 우리에게 그분앞으로 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것이 바로 예배인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 영광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며,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며, 그리고, 옛날의 관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마음은 영의 거울이며 그 영의 본질을 나타내며, 그 특성대로 작용하는 것뿐인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나시게 하고,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속량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오직 성령에 의지하여 사단을 패배시켰다.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난 뒤, 비로소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분은 틈만 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위대한 역사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도 안에서 연합된 사실을 직접 목도하게 하고 실제화시키는 데 있다.
우리는 이제 주님과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갔으며, 그 보좌로부터 하나님이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성령이 우리의 영 안에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는 중심 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즉 '나 중심'에서 부홀승천하신 주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생명 안에 들어간 '하나님 중심'인 것이다.
사동행전29장은 지금도 우리를 통해서 쓰여지고 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 보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던 모든 권리를 사단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이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May your kingdom come soon. May your will be done here on earth, just as it is in heaven)
예수님께서 그분이 다 이루지 못한 지상사역을 그분이 다시 올 때까지 우리가 이루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영적 전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위해서는 선포기도가 필요하다.
선포기도의 능력이 임할 때 비로소 영적 전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도 지금부터 선포기도를 배워야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를 우리도 해야 한다.
선포기도의 다섯가지 핵심
1. 담대함
2. 책임소재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통로로 쓰임 받을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선포하는 것이다. 실패없이 성공할 수는 없다. 여러분이 기도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다시 기도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는 것이 진짜 실패인 것이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
기도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쯧쯔파(chutzpah)' 믿음을 가져라.
쯧쯔파를 가진 사람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3. 믿음
우리가 기도할 때 가져야 할 믿음은 내가 기도하면 기도 받는 상대방에게 무엇인가가 일어난다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기도하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하나님 역사의 유무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다.
4. 성령님의 임재
반드시 기도하기 전에 성령님이 그 자리에 임하시도록 초청하라.
성령님의 임재 없이 단순히 자신의 믿음만으로 외치는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말씀의 능력은 성령님의 임재안에서 이루어진다.
5. 성령님과의 친밀함
선포기도의 능력은 성령님과의 친밀함에 비례한다.
만약 하나님과 내가 친밀하면 할수록 하나가 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 더 이상 간구할 것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직접 치유받을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질병이 떠날 것을 명령하면 되는 것이다.
선포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주님! 제가 이 산을 들기에는 너무 큰데요"가 아니라 산을 향해 "산아 하나님이 너보다 얼마나 큰지 알지어다"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기도 전에는 대상을 보지 말고 그 대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보라. 그리고 선포는 하나님께 하지 말고 대상에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말하는 대로 들어주실 의무가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실 의무만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지 우리의 소원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만큼 선포할 수 있는 권세도 있다.
성령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라. 입으로 소리 내어 성령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주파수를 성령님의 음성에 맞추어 놓고 성령님의 함께하심 자체를 즐기라. 그리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라. 그러면 성령님이 말씀하실 것이다.
능력은 스스로 취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성령님과의 올바를 교제를 가지면 인격은 자연히 성숙해진다. 오히려 성령님의 인도함없이 변화된 인격이란 가식적인 인격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의 능력에 접할 때 그 인격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능력에 접하지 않고는 변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실재로 인격과 능력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었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인격과 능력은 하나님 안에서 함께 자라나는 것이며,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밖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인격의 변화는 나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타나는 것이다. 딸서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되는 인격적 성숙은 결국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순종, 즉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의 뜻을 맞출 때 인격이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에게 통치권을 넘겨 줄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말씀은 오직 성령의 감동함으로 계시를 통해 풀어주실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끊임없이 성령님께 의지해야 한다.
말씀 없이는 성령님이 하실 일이 없다. 성령님은 예수님이신 말씀에 기초하여 역사하신다.
성경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의식적으로 적용하려는 노력은 성령님을 알아가는 것과 동등하게 중요하다.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 입에서 나오느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 제한을 받으신다. 반면에 우리가 이 땅에서 쓸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자원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친밀함의 정도에 제한 받는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하시고,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지, 성경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공부하라고 가르치신다. 말씀과 성령의 관계는 벽난로 속의 불(fire in the fireplace)이어야 한다.
사단은 예수 믿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우리의 삶을 그분에게 양도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단순한 내주가 아니라 충만히 거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은 '위로부터 임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지, '안에 거하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when the Holy Spirit has come upon you, you will receive power and).
위의 말씀에 따르면 권능을 받는다는 것은 현상적으로 볼 때 성령님이 위로부터 임한다는 것을 말한다.
성령 충만함은 'in you'에 관한 것이고, 기름부으심은 'on(upon) you'에 관한 것이다. 성령님의 내주나 성령님의 충만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즉 성령님을 의미하며,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 준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곧바로 하나님은 죄의 문제와 내면의 상처를 지적하신다. 구원을 얻기 위한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용사가 되기 위한 회개를 원하신다.
내면의 죄를 완전히 불태우지 못하면 스스로 '적과의 동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면의 상처와 슨뿌리를 제거해 내기를 원하신다. 이 때 사단이 우리를 가장 많이 정죄하거나 두려움을 주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단계를 거치면 그 다음 단계로 친밀함에 대한 훈련을 시키신다. 성령님과의 동행함 말이다.
마지막 코스로 순종을 시험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순종 말이다. 이 과정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느데, 첫 번째는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인가, 두 번째는 자신의 생각과 유익에 맞지 않고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순종하는가이다.
설령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늘 제대로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궁극적으로 기름부으심이 인하는 것 같다. 임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가 된다는 의미이다.
기름부으심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역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을 위한 것이다.
기름부으심은 본인이 자신의 삶을 성령님께 어느 정도 맡가는가에 달려 있다.
한순간은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지만, 그 충만함을 유지하여 기름부으심을 받는 것은 본인에게 달렸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할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기름부으심의 비밀은 흐르는데 있으며, 더 많이 흘려보낼수록 더 큰 기름부으심이 임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름부으심은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니, 자신의 명성이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넓히기 위한 하나님의 권능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서 더 많이 사용한다면 기름부으심이 더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영적 배고픔(hunger)과 겸손(humility)이 우리 마음에서 섞일 때 놀라운 반응이 일어나는 것 같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그 절박함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오게 하시고 많은 것들 체험하게 하시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임 받게 하신다.
아버지는 오직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구하느느 자에게 응답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심고 거두는 법칙에 의하면 심은 대로 나고, 수확의 법칙에 따라 풍성히 거두어 들인다.
수원지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 그러나 펌프로 그것을 퍼 올리기 위해서는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하며, 이 물이 있을 때 깊숙한 수원에 박아 높은 파이프로부터 물이 끌려 올라온다.
기름부으심의 비밀은 다른 사역자로부터 더 많은 기름부으심을 받는 것에만 있느느 것이 아니라, 받은 기름을 어떻게 흘려보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름부으심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흘려보내지 않고 기름부음을 받기만 한다면 아래쪽에 고인 오래된 기름은 썩기 시작한다. 기름이 썩으면 악취가 난다. 악취는 교만이나 이기적인 신앙 그리고 자랑 등으로 나타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름부으심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공허한 영혼을 많이 품으면 품을수록 기름부음은 더 커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고자 하는 기름부음에는 끝이 없다.
하나님이 기름부으심을 주는 정도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빈 그릇의 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주님! 이들의 빈 마음을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니, 나를 통로로 사용하여 흘려보내 주소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원하는 사람의 자세다.
이 성경말씀에는 놀라운 비밀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릇을 빌린 후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이다.("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문을 닫는다는 것은 내 뒤에 따라오는 모든 생각들과 의심들을 접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단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면 아무도 그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의롭게 된 나(예수의 피로 깨끗케 된 나, 제사장인 나, 하나님의 자녀인 나, 하나님의 통로로 사용되어지는 나) 외에는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기름부으심을 흘려보내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할 떄 물 떠온 하인이 한 일은 단지 순종했을 뿐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 제자들이 한 것은 단지 순종해서 나누어 주었을 뿐이다. 왜, 어떻게를 따지지 않았다. 그냥 순종했을 뿐이다. 나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나의 세상적인 생각에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그 자체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기름부으심은 이 빚을 다른 사람에게 갚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절대로 굶기시지 않는다.
단 그 기름으로 자기 배만 불리려 애쓰지 않는다면 말이다. 기름부으심을 받기 원하는 자는 끊임없이 빈 그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한다. 그리고 문을 닫고 기름부음이 흘러나가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다른 배고픈 사람을 위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 간구할 때 모든 것에 우선하여("....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안니할지라도...") 필요를 ("...그 소용 대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느느 기름부으심을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 끈질김에는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부어주시는 기름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기름부으심의 비밀은 흐르는데 있지, 차고 넘치는 것을 나누어 주는 데 있지 않다.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역자는 기름을 많이 담을 수 있는 큰 통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호스(hose)와 같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로로 쓰임 받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하나님이 보시는 정체성으로 바꾸는 작업은 자신의 죄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작업보다 더 힘든 작업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기름부으심을 얻기 위해 우리 쪽에서 해야 할 마지막 단계라고 여겨진다.
- 왜 기름부으심이 필요한지 확실한 비전을 가지라.
- 하나님의 만지심을 얻을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
- 성경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나 기름부으심에 관한 책을 읽어라.
- 끊임없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훈련하라.
- 다른 사람에게 사역하는 이상으로 하나님께 사역하라.(예배와 경배와 찬양을 의미한다.)
- 기름부으심의 대가는 죽음이다. 자아를 죽여야 통로가 열린다.
-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분들에게서 기도를 받으라(삶과 인격 그리고 사역이 균형 잡힌 분들인가를 보라)
- 영혼을 긍휼히 여기라.
기름부으심을 갈망한다면 자신을 변화시켜라.
당장 내적치유를 시작하라.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주신 권세를 이해하라.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친밀함과 면전의식을 가지라.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능력이나 처지에 대한 믿으미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보다 더 크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라.
거룩에 대한 열망을 품ㅁ으라.
우리는 항상 왜 기름부으심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내면의 동기를 살펴야 한다.
성령님이 연장통이라면 다양한 연장은 은사인 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사르르 구해야 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말씀에 따르면 듣고 배운 지혜로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복음을 받은 사람의 믿음 또한 하나님의 능력에 토대를 두게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전도 핵심이다. 이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은사이고 열매인 것이다.
은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기 위해 은사를 구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 그분을 더 깊이 추구하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적 차원에서의 부작용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제한하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
기도할 때 지식의 말씀이 임하면, 기도 받는 사람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알게 된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미래에 대한 지침을 주는 예언의 은사와는 달리 주로 현재나 과거에 일어난 사실에 대해서 말해 준다.
지식의 말씀이라고 한마디로 말하지만,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 은사를 계시하신다.
이 은사는 사역시, 느낌으로, 봄으로, 읽음으로, 생각함으로, 말함으로, 꿈으로, 경험으로 등 대략 일곱가지 방법으로 온다.
우리가 새 생명을 받은 후부터 더 이상 그렇게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옳은 일을 하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듯이다. 성령님이 임하셔서 나를 주관하시면 오감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눈은 단지 보이는 것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보도록 회복될 것이다. 귀는 외부에서 나는 소리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은사의 계발은 실수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라.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이 마음대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전체를 드리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때 성령님은 이러한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주신다.
영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두움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어두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가? 바로 신앙이다. 선배들이 보여준 예수의 증거, 성경의 말씀, 보혈의 피 그리고 믿음과 인내이다.
그분의 소리가 비록 희미하고 미세하더라도 분명히 들을 수 있다.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아버지 하고만 시간을 보내는 '거룩한 낭비'가 필요하다.
당신에게 대수롭지 않은 말일 수 있지만,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혜롭게 말해야 한다.
꾸미지 않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방언은 은사이며 은사는 사역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구원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 중 하나이기 때문에 다른 은사를 구하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은사 중의 하나님에 틀림 없다.
방언을 통해서 그러한 은사와 능력이 활성화 되는 것은 사실이다. 왜냥하면 방언의 훈련은 우리의 생각을 거치지 않고, 우리의 영으로 직접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초적이고 실제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방언은 영의 기도이기 때문에 통변의 은사 없이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중보기도를 돕는다.
방언도 계속하면 더 부드러워지고 유창해지며, 다른 방언을 받기도 하고, 방언의 뜻을 이해할 수도 있다.
방언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은 성령충만함이다.
방언은 내 의식 하에서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방언의 주도자는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시며, 나를 그분에게 온전히 의탁하는 것이다.
축복(blessing)아니면 저주(curse)이지 그 중간은 없다는 것이 성경적이다. 저주를 생각하지 않고 피한다고 해서 저주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주를 제대로 알고 저주를 끊어야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거할 수 있다.
우리는 더이상 저주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임한 저주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찾아내어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면 회개하고, 악한 것들에 의한 것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여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저주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근거와 적용을 오해하고 있다.
"영적인 능력은 우리의 동의에 의해서 흘러가게 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은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은 사단에게 동의하는 결과가 되고, 사단은 그 지점을 통해서 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반대로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말을 선포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동의하는 것이 되며 그것을 통하여 축복이 흘러 들어가게 된다.
흔히 부모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녀의 행동이나 무능력에 대해 행한 부주의한 말이 저주가 된다. 이런 부주의한 말은 자녀의 미래에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말들은 아이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영적인 묶임(귀신의 묶임)을 가져온다.
남편이 아내에게 함부로 하는 말들이 저주의 경로가 된다.
말로 하는 학대는 계속 이어질 때 육체적인 학대보다 더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저주를 끊는 능력과 권세느느 예수님의 이름과 십자가에서 온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더러워진 그곳에 악한 영이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곳으로 거처를 옮길 때마다 땅을 회복시키고 그 장소가 영적으로 깨끗한 곳이 되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또한,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 곳이 하나님의 땅임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며 왕같은 제사장이다(벧전 2:9).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뿐만 아니라 우리가 거하는 땅과 장소도 거룩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하나님 아들들이 자유함을 얻는 것이, 땅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과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열쇠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땅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한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사전5:22)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죄와 죄악으로 인하여 땅이 더렵혀지면, 그 땅 또한 우리를 더렵히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는 두 발을 밟는 곳마다 이 세상 신과 타협하거나 계약하거나 동의했던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끊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뜻에 동의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사 이 땅에 선포됨으로 그분의 나라가 임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사실 개인적인 집과 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도시와 같은 지역 그리고 국가와 나라에서도 일어나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적 청소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행위, 물건, 관계(포괄하여 형상)를 깨끗하게 정리해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 형상에 있는 악한 세력의 영향력을 파쇄하라. 그리고 아깝다고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팔지 말고, 부숴버리거나 태워버리라.
저주를 끊기 귀한 가장 중요한 기도는 '회개'다.
우리에게 가장 와 닿는 동일시 회개는 신약의 예수님의 회개다.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거하신 지 없는 예수님이 죄 있는 인간을 대신해서 회개하는 놀랍고 신비로운 장면 말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인데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동일시 회개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죽으심으로 죄인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외형적인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아닐까?
모든 회개는 '죄와 저주 파악하기(영적도해)'에 기초하여 행해져야 한다. 이러한 기도는 두리뭉실하게나 대충해서는 안된다.
사전에 충분히 준비해서 정확하게 목표물을 조준하여 파괴하는 저격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선 '죄와 저주 파악하기'에 기초하여 당신과 당신의 가족의 죄, 나쁜 태도, 습관, 관계, 우상숭배 등을 조목조목 회개하라.
회개와 동일시 회개가 끝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임하시도록 그리고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음을 선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님이 이곳에 임하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성령님 이곳에 당신의 영광이 임하시옵소서! 천사를 보내 주셔서 이곳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이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였음을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마지막으로 '축복기도'를 하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이제부터느느 그 땅이 저주의 땅이 아니라 축복의 땅임을 선포하라. 어떠한 죄와 죄악, 저주도 영원히 임하지 못할 것임을 선포하라. 그곳은 하나님의 자녀가 다스리고 정복한 땅임을 선포하라.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라.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 그 땅과 장소를 다스릴 것을 선포하라.
마지막으로 예수님 이름으로 천사를 요청하여 지켜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라.
모든 영적 전쟁의 시작은 당신과 당신이 거하는 땅(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땅)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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