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의 글은 언제나 힘이 빠진채로 서술된다. 하지만 그 안에 강한 힘이 있음을 느낀다.
무너진 마음,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아픔을 겪고 지쳐 있을 때, 책을 통해 마음을 만져주시고 은혜를 주신 주님..
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겸비하시고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시는 목사님께 귀한 책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꼭 전해드리고 싶다.
말라위 덕분에 만난 인연에 귀한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프롤로그
짝짝이 운동화를 신고 있듯이 편협하고 변질된 믿음을 갖고 있는 한 내 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하나님의 축복들은 발견되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세상의 기준에 맞춰져있다면 그 어떤 말로도 사람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지 못합니다. 오직 바른 믿음을 가질 때만이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응원의 소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격려와 응원은 바른 믿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을 소유할 때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응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응원을 듣고 느낄 수만 있다면 삶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어렵지 않게 풀릴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원리를 만드신 분이 제시하는 해결책이요, 응원이요,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1부 '하나님이 정말 내 곁에 계실까' 묻고 싶은 당신에게
밤새 바람이 불 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쎄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기적과 이적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견해와 기대감은 똑같습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과 순식간에 바뀌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치 이것이 신앙의 최종적 결정체라 믿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이적은 모세의 지팡이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람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홍해를 갈라지게 한 힘은 바로 하나님의 바람이었음을 우리는 주의 깊게 봐야 합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홍해가 갈라지는 큰 이적이 모세의 손끝에 의해 단번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까지 밤새 부는 동풍을 동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까지 밤새 부는 동풍을 동원하셨습니다. '큰 동풍'이란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현상입니다. 이 평범한 현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큰 이적을 이룬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바람에 귀를 기울여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일상적이고도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에 관심을 갖고 관찰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큰 이적을 이뤄내시는 능력의 과정이라는 것도 눈치채고 계십니까? 모세의 지팡이보다 큰 동풍에 하나님의 힘이 실려 있듯이, 순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찾기보다 우리는 일상적이고 자연적 현상에서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장미꽃 위의 이슬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바람 속에서 주님을 볼 수 없을까요?
이제는 눈을 떠 작은 일상 속에서도 이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손을 내어 밀자 하나님께서는 큰 동풍을 동원시켜 순식간에 바다가 갈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그 바람이 밤새 일어, 즉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바다가 갈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적을 이루시기까지 어느 정도 일상적인 시간을 두실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손을 내밀어 놓고 밤새 바람만 맞고 서 있는 모세처럼, 우리의 기도는 늘 불안했습니다.
이런 더딤의 현상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눈은 언제나 우리를 향하시고 우리으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이루실 준비를 착실히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즉 시간이 더딘 것 같고 당장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계속해서 동풍이 불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일상생활을 통해, 평범한 것 같은 하루하루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그 기도를 이루시기 위해 우리의 환경을 천천히 바꿔놓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나의 일상생활을 통해 말씀하시고, 또 기적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하고 가장 필요한 시기에 우리가 깜짝 놀랄 만큼 모든 것을 바꿔놓으십니다.
기다림이 힘들고 속이 시원치 않아도 밤새 하나님의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왜 우십니까, 누구를 찾으십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인물, 막달라 마리다
그녀의 절망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에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려가며 열정적으로 주님을 따랐지만 그 결과가 '절망'
뿐이라면, 그녀의 신앙은 참된 신앙일까요?
우리에게는 열정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헌신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순교의 각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가정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사업의 문제, 자녀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가 크게 다가오면 가장 먼저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신앙을 적용하려 해도 힘없는 죽은 신앙만 있을 뿐입니다. 웃면서 아무 능력이 없는 죽은 예수만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우리가 소유해야 할 신앙은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도대체 부활의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부활신앙은 주님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와 함께 사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사셔서 내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삶의 크 고 작은 문제 속에서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신앙은 우리에게 완성된 신앙의 모습을 가져다줍니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이 내 안에 게시기 때문에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신앙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면 그분은 반드시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부활신앙의 의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을 다 마치게 되면 다시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없으면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이 있으면 가까이 있는 사람이 죽어도, 아니 내가 죽는다 해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슬픔 중에도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위로를 얻게 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려움을 만나면 절망하고 좌절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울며 주님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못할 때에는 주님을 차장도 죽은 예수님만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삶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면 사정을 달라집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의 모든 슬픔과 눈물을 없애주시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는 주님을 부인하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죽었던 주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소망을 줍니다.
약속과 징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사7:11)
징조나 징표, 그것은 언약의 표 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말씀만으로도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의심이 ㅁ낳아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인간에게 말로만 약속을 한다는 것은 힘든일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떄마다 여러 가지 징조를 보여주어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처녀가 잉태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아들을 낳는 것을 보면 그것으로 하나님이 함께한다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징표는 아하스 왕에게만 주시는 징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징표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아주 확실한 징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처녀가 잉태한 그 자체입니다.
마리아라고 하는 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징표입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걱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심많고 미련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시청각적인 가르침입니다.
하나의 징표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절망할 수 없는 징표가 하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좌절할 수 없는, 두려워할 수 없는, 답답해 할 수 없는 그런 징표가 하나 있습니다. 그 징표가 있기에 어떤 ㄷ어려움이 달쳐도 힘을 잃지 않습니다. 그것은 처녀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한다는 그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징표가 바로 내게 생명을 주고 힘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것 하나면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억지로라도
어떤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은 언제나 같아야 합니다. 목적은 좋은데 수단이 나쁘면 그 목적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예수님은 작은 것들조차도 희생시키지 않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드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것도 풍성히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찮은 개인에 불과한 자에게도 찾아가셔서 풍성한 삶을 약속대로 주셨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억지로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고 그 가정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것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때문에 불이익을 받아도 견뎌내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할때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 십자가를 놓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선순위에서 주님은 몇 번째일까요?
억지로라도 끝까지 주님을 놓지 말고 붙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최후의 승리가 있고 빛난 면류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편, 어떤 상황이든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본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꼭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잡는 기도, 놓는 기도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적이 목적이 아니라 그런 이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어도 사는, 그래서 영원히 사는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주신 달란트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자신이 결정을 해놓고 그 안에서 스스로 기뻐하기도 하고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해 이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주시기 위해 덜 가치 있는 것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을 알게 하기 위하여 베푸신 이적은 '축복'이라고 여기는 반면, 축복 그 자체인 '구원'에는 별 매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집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를 자녀 삼아주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갖고 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하십니다.
신뢰는 기독교의 주변적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적 핵심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핵심인 것입니다.
잡는 기도를 '의뢰'라 한다면 놓는 기도는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신뢰를 요구하십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제일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오늘도 선한 일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소원을 의뢰하렵니까? 아니면 제일 좋은 것을 주시기 위헤 계획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렵니까?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깊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부활이 주는 소망
우리는 아직 믿음이 약하여 이럴 때 하나님을 향한 많은 원망과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
이 기준으로 볼때 가장 불쌍한 삶을 사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악이 선을 이기고, 불의가 의를 이긴다면, 만약 그것이 이 세상 삶의 법칙이라면 인간 세상은 더 이상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셨고, 의로 불의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악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바꿔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의미는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죽음을 이깁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의미는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하셨습니다. 연약해 보이기까지 한 예수님은 언제나 악에게 지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탄의 시험을 부활하심으로 멋지게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악을 한 번에 제압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는 사랑이 미움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미음을 이깁니다. 부활이 주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부활의 의미는 진실이 거짓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사셨던 예수님은 이렇게 거짓된 사람들에 의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극적인 반전을 보여줍니다. 이는 진실이 거짓을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진실이 거짓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도 누구나 다시 살 수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가져야 할 삶의 기준이요, 자세를 의미합니다. 생명이 사망을 이긴다는 것이고,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이고, 사랑이 미움을 이긴다는 것이며, 진실이 거짓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믿음의 사람들은 승리한다는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상속에 숨겨진 천국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13:44)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천국이 모든 것을 팔아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억기 위하여 덜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은 소중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매일매일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천국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거기에 천국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 지금 고난과 고통 중에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 것은 그 시간이 천국을 소유하는과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련을 당한다 해도 그저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고난은 삶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천국을 고난중에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모든 것을 다 팔아서도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천국을 발견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은 천국을 발견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천국은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소유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천국은 이미 있습니다.
이만한 믿음
'기독교의 신앙'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거듭나고 변화되려는 데에 그 기본 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뜻을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자기의 삶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자기부인, 권리포기, 내려놓음이 필수적으로 수반됩니다.
기독교의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으로 인한 삶의 변화를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한 성화의 모습을 다 포함하여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작은 자에게 따뜻한 사랑을 품을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도 필요하고, 또 그 말씀대로 변화되는 삶의 모습도 필요합니다.
늘 언제나 늘 가까이
평범한 중에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별로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무사하다는 것, 평범하다는 것, 또 하루를 살았다는 것,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
왜 감사해야 하는가.
이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적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1-12)
고난과 역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 수 있게 해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왜 감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은 매일매일 생활 중에 이어집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먼저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듣고, 언제나 모든 것을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2부 '내가 제자로 사는 것일까' 고민하는 당신에게
믿음보다 자세
가장 중요한 것이 내면에 있어야 진정한 교회요, 진정한 신앙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것'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떄문에 하나님의 일이 망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모두 보상을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봉사자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려는 사람들은 믿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바로 종 됨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종 됨의 자세는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
스스로 좋은 신앙인임을 자처하며 자신의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구체적인 희생이 따라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칭찬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율법을 지키는 외형적인 신앙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 순종하면, 오히려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모습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하나님께 더 많은 것 드리고 싶어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어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 순종하고 시어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칭찬하시며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
두 아들이 마신 잔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루하루를 사느냐입니다. 어떤 길을 가든, 매일매일 복음 때문에 철저히 희생을 각오하며 낮아지는 자세가 바로 제자의 길인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과 같이 매일매일 우리가 반복적인 삶을 살아도, 그리고 순교하지 못하고 날마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아파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것 자체도 십자가의 길이라고. 믿음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 이기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 또한 주님이 마시라고 하는 십자가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본질과 현실 사이에서
신앙생활을 꽤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시련이 닥치면 자꾸만 낙심하게 되고 결국 신앙도 잃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처음부터 현실적 문제에 신앙의 에너지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강한데 현실이 약했습니다.
현실적 신앙에도 강한 에너지가 있으면 그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결국 승리케 해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움도 승리의 과정이라 확신하는 것입니다.
본질적 신앙이 강하다면 현실적 신앙도 같아야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을 놈들은 니들밖에 없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8:19)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가 속해 있는 곳에설 언제나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가장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공동체의 꼬여 있는 문제를 풀어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새 일을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때문에 이 세상이 살맛나는 땅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믿는 당신이 대안입니다.
더 낮아지고 더 작아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와의 만남이 오래될수록 우리는 더 낮아지고 더 작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이 죄인을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만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얼굴을 들지 못하고 눈물 흘리며 주님 따라가는 자녀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금송아지와 십자가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금송아지입니까? 아니면 십자가 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다시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3부 하나님의 가정을 꿈꾸는 당신에게
더 굶주린 사람은 누구일까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 누가 더 굶주렸을까요? 분명 아버지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누가 더 갈증을 느끼고 있었을까요? 분명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오늘도 그렇게 간절합니다.
한나의 기도, 엘가나의 지원
죽을 것 같은 고통, 원통함과 격분, 수치스러움, 땅에 떨어진 자존감, 삶을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요? 한나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이런 삶의 큰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를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 1:18)
기도 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기도 후 근심의 빛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까요? 전적으로 믿어야만 근심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는 것을 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한 후에도 근심을 갖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 21:22)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셨을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굳게 믿는 어머니,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생각하는 아버지,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기도라는 것을 아는 부모., 그런 가정에 하나님은 사람을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가족이 같은 마음으로 기도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남편과 아내를 만나게 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자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배제하고 가정과 가족의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모든 가족이 하나님만을 의뢰할 때 가정의 문제는 풀릴 것입니다.
좋은 아버지의 조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잠 1:7-9)
부모는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합니다. 신앙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하고 바른 자녀로 키우기를 원한다면 부모가 먼저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말씀과 생활이 같은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좋은 아버지란 그 작은 일에 변함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녀가 부모를 자라게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사람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끄십니다. 그것을 아는 부모만이 자녀를 제대로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께 자녀를 맡기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다 잘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을 잊게 되고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살다가 실패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인생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엎드릴 수만 있다면 그 인생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안된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맡기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장 좋은 멘토입니다
멘토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한 아이가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 곁에 있어야 합니다.
삶의 성공뿐 아니라 실패조차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뤄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룻은 보았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조차 기쁠 때는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좋아하지만 불행이 닥칠 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삶을 인도하십니다.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그것을 알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진정 좋은 멘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4부 자신의 허물과 약점으로 마음이 슬픈 당신에게
자신이 만든 감독
'자기 사랑의 감옥' 이것은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근심의 감옥' 쓸데 없는 일을 걱정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잡니다. 몸도 마음도 상하고 맙니다.
'과거의 감옥' 지난 일에 대한 후회. 지난날에 매여서 현재와 미래를 그르치고 있습닏. 또한 과거의 영광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도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늘 과거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선망의 감옥' 남의 것만 좋게 보는 부러움을 말합니다. 어떤 처지든 내가 처한 환경이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행복한 것인데, 자족할 줄 모르고 남의 처지와 형편만 부러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망의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증오의 감옥'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일,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얽어매는 무서운 감옥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지수는 얼마나 자기를 감옥으로부터 꺼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사랑의 확증과 사죄의 기쁨은 존재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자존감을 높여주지요.
그녀는 자신을 다 알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신 예수님께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모든 감옥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감옥뿐 아니라 죽음의 문제까지도 모두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를 만난다면 우릴도 그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염려를 준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가장 필요하고 귀하고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평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싶어 하시는 이유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평안이 가장 소중하고 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평안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준비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반드시 갖고 나아가야 하는 것
감사의 마음.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을 존경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는 마음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것과 내 삶을 인도하신다는 믿음과 고백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염려를 받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염려도 가지고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예배할 때 염려 또한 드리기 위하여 준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하나님꼐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염려를 받기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하나님께 드린 것은 다시 가져오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 한번 드린 헌금을 다시 가져오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 한 번 드린 염려는 다시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
모든 시험과 염려는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과 염려가 사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보다 항상 한 수 위라는 사실입니다. 사탄이 주는 시험은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우리의 능력으로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능력도 모르고 사탄의 능력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꼐 염려를 드리지 않는 것과 또 하나님께 드린 염려를 다시 들고 오는 것은 불신앙이고 죄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죄이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죄이고, 나를 만드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죄입니다. 우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갈 때, 염려를 준비해서 나아가십시오. 정성을 다해 염려를 정리해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린 것을 다시는 가지고 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섭섭해 하십니다.. 하나님으로 나의 아버지가 되게 하십시오.
우리가 염려를 주께 맡기고 다시 가져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때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평강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릴 때, 평강은 우리 안에 이루어집니다.
고통의 반전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고통중에 기뻐한다는 것, 그리고 고난 중에 감사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고통이 끝나지 않고 진행될 때에는 감사하기가 불가능하고 그런 상황에서 기뻐하는 것은 정신 나간 일처럼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고통은 서로가 모순되지 않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 기준을 말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아픔과 슬픔이 감사의 조건이 될 수 있으며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고통과 시련이 주는 유익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를 연단하여 하나님의 강한 사람으로 쓰시기위함입니다. 더 큰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주를 만날 때 흠 없이 보전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나그네와 같이 이 땅에서 잠시 사는 동안 강건해져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주님을 만날 때까지 온전하게 보전되기를 기도합니다.
옥합 깨뜨리기
예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지 않는 길은 우리가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느끼며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 모습 그대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취해야 할 모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를 가리고 있었던 옥합(complex)을 깨는 것입니다.
담을 헐고 주님 앞에 그 콤플렉스를 갖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담은 그릇
아무리 못되고 추잡한 사람이라도 주님은 고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아직도 제어할 수 없는 음란한 생각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거친 생각들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합니다. 과거에 좋지 않은 경험들, 방탕했던 생활들, 남에게 피해만을 주던 악한 행동들, 그런 것들로 인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비워 예수를 담으면 더 이상 작은 자가 아니라는 것, 우리의 과거가 아무리 좋지 않다해도 예수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 예수님의 오심에 그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5부 알 수 없는 미래로 불안한 당신에게
배에 오르신 임마누엘의 하나님
특별히 배우자를 선택하는 등의 결정이 필요한 순간 이성이 아닌 감성적인(감정적인) 판단이 앞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인 판단이나 결정이 모든 일을 그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결정할 때 이성적인 결정만큼이나 많이 하게 되는 것이 감정적인 결정입니다. 감성적 결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모든 일은 이성이나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감성의 마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감성의 대표적 요소들로는 사랑, 지혜, 믿음 등이 있습니다. 이성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지만 감성은 자신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이성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행동을 끌어내지만 감성은 사람들의 무서운 헌신을 끌어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국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증명될 수 없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목적지로 가려고 할 떄 가장 힘써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배에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배에 태우는 것, 그분과 함꼐 가는 것, 임마누엘(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
삶의 모든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하나님은 때로 Yes라고 응답하지 않고 No라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고치시고 구원하십니다.
태도가 93%다
성공하는 요인으로 4가지를 꼽고 있는데 그것은 지능, 지식, 기술, 태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4가지 중에 태도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93%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식도 물론 중요하고 기술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신앙의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자세를 더 주의 깊게 보시기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제일 빠지기 쉬운 위험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하지 않고 일하는 것과 또 하나는 일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세는 바꿀 수 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상황은 바꿀 수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의 자세는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생의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좋은 자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높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출신이 잡류여도 관계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를 갖는 사람들, 그들에게 하나님꼐서는 이 땅을 맡기십니다.
갈렙, 그 사람이 사는 법
85세 노인이 갈렙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14:10-12)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9)
비결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불안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고 절망적으로 보이지만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불안해하며 반대를 해도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문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문제는 그 뒤에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지하면 우리는 좌절합니다. 모든 문제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갈렙같이 85세가 되어도 하나님의 일을 크게 감당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7일간 기다리다가 사무엘의 도착이 늦어지자 사울은 불안했습니다. 불안을 이기지 못한 사울은 자신이 사무엘을 대신하여 하나님꼐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함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왜 끝까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지 못하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을 동반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만이 끝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사람이 참을 수 있는 시간보다 언제나 조금 더 뒤에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시도하다가도 결국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시금 세상의 방법으로 문제를 풀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때 어떻게 하시렵니까? 어렵지만 그럴 때에도 믿음으로 끝까지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기다릴 수 있게 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기다려 보십시오. 조금 더 하나님을 의지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행동은 언제나 우리의 기다림의 한계, 바로 그 뒤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죽 한그릇만도 못합니까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결국 하나님의 규정과 법칙을 소중히 여긴 사람이 가나안의 주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나아가 예배하는 것,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장자권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특권인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 있는 것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와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규정과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말씀은 밥 한 그릇과 바꿔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소중히 붙들고 살 때, 삶의 풍성함이 느껴질 것입니다.
인생의 두 기둥
다윗은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함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에 순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알면서도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였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최선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야긴' 그가 세우시리라
'보아스' 하나님의 민첩한 능력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이 성전을 세우셨다.
피를 흘려 죽여야 했던 희생 제물의 정신은 이렇게 자신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자기를 죽이는 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성전은 바로 우리의 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하나의 성전을 짓는 여정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성전을 지어갈 떄 '야긴'과 '보아스', 즉 능력의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삶을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끄는 주류가 되도록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세워지는 듯하다가 무너지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우리의 삶을 세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믿거나 신뢰한다면 절대로 우리 삶을 아름답게 세워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별명
그들이 했던 것은 단지 말씀대로 자신을 지키며 살았던것뿐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신을 지켰던 것이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9:5)
우리들이 교회가 아닌 사회에 나가서 생활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착한 행실을 나타내는 것, 그리고 될수 있으면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루하루를 사는 당신이 세상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6부 인생의 장벽 앞에서 걸음을 멈춘 당신에게
엎드린 마음에 깃드는 은총
압살롬이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고집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면 다윗은 위기의 순간에 더 빛이 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기의 상황을 맞이하면 언제나 어김없이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삼하12:16)
성경에서 하나님께 엎드린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삶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주 앞에 엎드린다는 말 속에 모든 신앙적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나는 죄인이고, 그러기에 죽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있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십니다.
주님이 나를 안다는 사실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또한 엎드린다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엎드리는 것, 그것은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뜻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라도 하나님 앞에서 엎드린다면 나를 포기하겠다는 그 마음이 우리에게도 조금은 있을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내 안이 다른 관심으로 꽉 차 있으면 예수에 관한 관심을 간직할 수 없습니다. 나를 비워야 다른 마음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고집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만이 위기의 순간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합격사과의 비밀
90%의 부정적인 상황에도 10%의 긍정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1:6)
하나님께서는 잠깐이라 하는데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여전히 길게만 느껴집니다. 아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에게 잠시는 그분이 의도하신 바가 이루어지는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의도란 우리를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고난의 시간은 내 마음의 교만과 거짓을 뽑아내는 시간입니다.
그 엄청난 눈물로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겸손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잠깐이라는 시간은 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00년이나 1시간이나 언제나 잠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고난은 우리의 삶에 용광로입니다. 용광로를 통해야 불순물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고통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필연적으로 일치하는 관계임을 일찍 배울수록 유익할 것입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에례미야애가 3:19-23)
고난은 무익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은혜를 봅니다. 축복을 봅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쓰시기위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고난에는 오히려 유익이 있습니다.
다윗의 요새
함락되지 않는 것은 이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삼하22:19-20)
그에게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한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면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안의 기간이나 위기의 순간이나,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많이 가졌을 때나 다 잃었을 때나, 그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 있었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118:5-9)
이것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 하나님 편으로 분류되는 것,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이 우리를 지키시고, 지키실 뿐 아니라 우리를 더 넓은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새이기 때문입니다.
인생, 한 편의 드라마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내가 살아온 모든 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됩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나를 만들어가는 의미 있는 일이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거기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극적인 드라마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유롭게 움직이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그의 소원이 가장 빠르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그를 묶어 놓으셨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진전시켰다고 고백합니다. 심한 고통과 고난을 받았지만, 바울의 일생이 더욱 빛나게 되었고 아름답게 되었다는 고백을 합니다.
우리의 삶을 가장 좋은 시나리오로 감독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만 그 사실을 알고 기뻐하고 있는지요? 늘 평안해 하고 있는지요?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요?
낙심과 절망에서 일어나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진전이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비롯 지금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서 빚어 가시는 아름다운 우리 삶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뼈아픈 과거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좋은 기억이 아닌, 늘 나쁜 기억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는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한 가장 좋은 시기는 순탄한 길과 형통할 때가 아닌, 고난과 역경의 순간들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은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이요,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을 감히 축복과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고난이 닥치더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고 그 뜻에 복종하는 마음이 충만함으로 그 사람에게는 기쁨만이 따를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믿음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 듯 합니다. 그 믿음이 내게 말하는 것을 확신하면서, 또한 그 믿음대로 실천하면서 하나님과 함꼐 살고 죽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기간이 온통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뿐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크나큰 사랑이 있습니다. 내 곁에서 나를 붙드시고 계시는, 그래서 내 입에서 "하나님, 나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야 합니다"라는 고백을 듣고 우리를 모자람이 없고 부족함이 없는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그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실 뿐입니다.
고난이 감사가 되는 비밀
진정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당한 고난까지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요, 그 말씀대로 살려는 마음입니다.
헤롯의 때가 올지라도
가장 포악한 헤롯의 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헤롯을 놓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세상의 조건을 이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7부 '의미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길을 찾는 당신에게
진짜를 응원하시는 하나님
예수를 진짜로 믿는 한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키지만, 가짜는 아무리 많아도 교회에 제 발로 들어오는 한 사람 마음조차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8-14)
진짜는 빛이 납니다. 주님께서 빛이 나도록 비춰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님 곁에 있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의 빛을 반사시키면 되는 것이지요. 진짜가 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진짜는 한 사람이어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가짜는 아무리 많아도 한 사람조차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진짜가 되고 싶어 하는 당신을 응원하십니다.
빛나는 조연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말은 길지 않습니다. 언제나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말은 길지 않습니다. 말이 길지 않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을 돕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남을 살리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남에게 용기를 주는 일과 남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결코 긴 시간이나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음에도 우리가 그 일들을 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힘들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힘들지?" 라는 말로도 충분합니다. "힘들지?"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새 힘을 얻게 하고 병도 낫게 합니다. 결코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 세상과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일등이 되고자 애쓰는 것이 이 세상의 가치관이지만 하나님의 가치관은 주연이 아닌 조연이 되는 것입니다. 조연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주연이 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주연을 빛내주는 조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을 살리는 조연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을 살리는 일에, 남을 돕는 일에 최선의 힘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다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사람은 '떡' 먹고 배부른 것에 관심이 많지만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참된 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다가오셨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마 14:19)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떡이 아닌 다른 것을 주고 있습니다. 즉, 평안이 없는 세대에 평안을, 기쁨이 없는 세대에 기쁨을, 희망이 없는 세대에 희망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봐야 할 표적은 단순한 빵과 물고기, 도시락의 양적 증가가 아닙니다. 풍요로운 식탁의 축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왕이 주지 못하는 것, 세상의 사람들이 주지 못하는 것 즉, 평안, 기쁨, 소망을 주시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평안, 기쁨, 소망을 우리들이 보여주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
제자 된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평안, 기쁨, 삶의 소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평안이 있습니다!" "여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음은 힘이 있습니다. 그 복음의 능력을 우리가 먼저 알고 께닫고 느끼고 누려야 남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진정 세상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전할 수 있습니다.
곁을 지키는 사람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와 관계의 거리를 측정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5000명, 그 기적 중의 기적을 몸소 체험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들은 모두 예수님 곁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말씀을 듣기 위해, 말씀이 즐거워 예수님을 쫓아다녔건만 예수님이 고난을 받기 시작하자 모두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70명의 제자, 정작 예수님이 그들을 필요로 할 때에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 그러나 정작 드들도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날 밤, 저녁만 같이 먹고는 모두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으로 인한 불이익은 절대 받지 않겠다는 자세로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라고 하는 세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주님과의 관계가 모두 같을 수는 없습니다. 과연 우리 주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곁에 끝까지 남겠다는 그 욕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선한 그 욕심은 그분의 사랑을 얻기에 충분합니다.
마지막이 가까울 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은 부활신앙입니다. 천국의 소망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우리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곧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을 인식한다면 더 많이 용서하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이 생활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곧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행동은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ㅁ낳이 대접하고, 더 많이 봉사하게 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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